12월 26일 ’23만명 사망’ 인도양·아체 쓰나미 참사 20주기

Tsunami Aceh 박물관

2004년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 오전 8시께 수마트라섬 북부 아체주의 반다아체 앞바다 해저에서 규모 9.1의 초대형 강진이 발생했다.

최고 높이 30m에 이르는 쓰나미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서부 해안을 비롯해 인도와 태국,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등 인도양 연안 12개국을 강타했다.

쓰나미는 7시간 넘게 인도양을 가로질러 동아프리카 일부까지 덮치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난으로 꼽히는 이 사건으로 23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5만명이 실종됐으며 약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3만여명이 사망하고 3만7천여명이 실종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인도네시아에서는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날의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현재 아체주에서 교사로 일하는 아스나니 씨는 당시 17살이었다. 어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어머니 역시 당시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며 “오직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AP 통신에 말했다.

반다 아체에 사는 자파루딘 씨는 20년 전 시신 수습 과정에 투입됐다. 그는 검은색 픽업트럭에 올라 형태가 온전하지 않은 수십구의 시신을 옮겼다.

자파루딘 씨는 “당시에는 세상의 종말이 온 줄 알았다”며 “오랜 시간이 지나 트라우마에서 회복했지만, 당시 고아가 된 아이들만 생각하면 여전히 눈물이 난다”고 AFP 통신에 말했다.

2004년 쓰나미 참사 이후 28개국은 4억 달러(약 5천800억원) 이상을 투입해 인도양에 쓰나미 조기 경보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있는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쓰나미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2018년 9월에는 술라웨시섬 팔루 지진으로 6m에 달하는 쓰나미가 도시를 덮쳐 4천300여명이 숨졌다.

쓰나미는 많은 고통을 가져왔지만, 재앙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단합된 노력은 오랜 갈등을 풀고 화해를 가져오기도 했다.

당시 아체 지역에서는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반군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재난은 인도네시아 정부와 반군 세력을 단합하게 했고 30년 동안 지속된 분쟁은 2005년 8월 역사적 합의를 통해 마침표를 찍게 됐다.

인도네시아 싱크탱크 분쟁정책분석연구소(IPAC)의 시드니 존스 선임 고문은 “쓰나미 당시 양측은 모두 분쟁보다 복구와 재건에 더 관심을 가졌다”며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면 양측 모두 대중의 지지를 잃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양 쓰나미 10주년…재건과 평화로 인류애 확인> - 2

태국에서도 인도양 쓰나미 20주기를 추모하고 있다.

당시 태국에서는 최소 5천400명이 사망하고 약 3천여명이 실종됐다.

한국인을 포함한 관광객들이 목숨을 잃은 휴양지 푸껫을 비롯해 끄라비, 팡아 등 남부 지역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쓰나미 참사는 태국이 재난경보시스템 구축을 서두르는 계기가 됐다. 당국은 이후 안다만해에 쓰나미 부표와 경고 탑 등을 설치했으며, 5개 국어로 경고 메시지를 제공한다.

소폰 수완랏 푸껫 주지사는 “각 기관이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경고 체계를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양 쓰나미 후 동남아 지역 국가들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차원에서 협력하고,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를 중심으로 쓰나미 조기경보체제를 구축했다.

그 결과 인도양 쓰나미 경보 시스템(IOTWS)이 구축돼 2011년부터 완전히 가동되고 있으며, 인도양 주변 국가 24개에 쓰나미 경보 센터가 설립됐다. (연합뉴스 협약/ 자카르타 박의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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