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의 늪에 빠진 지구촌에 경기 침체의 먹구름마저 드리울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장기화, 기후변화, 유럽의 에너지 위기, 미국의 긴축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세계 주요 경제권이 불안한 모습을 보여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까지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외 의존도가 커 외풍에 쉽게 노출되는 한국 경제의 앞길도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 미국·유럽 경제 지표 ‘불안’…식어가는 중국 성장 엔진
전미실물경제협회(NABE)가 이달 1~9일 전문가 패널 198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19%는 미국 경제가 이미 침체에 빠져 있다고 답변했다.
올해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에 경기 침체가 시작될 것으로 본 응답자는 각각 25%, 28%였다.
이번 설문조사 책임자인 주히 다완은 “대체로 응답자들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경기 침체를 일으키지 않고 2년 안에 물가상승률을 목표치인 2%로 낮출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한 미 중앙은행 연준의 금리 인상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으로, 인상 폭과 속도에 따라 경기에 미치는 충격이 달라진다. 연준이 지난 6월과 7월에 이어 다음 달에도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지 주목된다.
미국 경제는 올해 들어 이미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올해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연율 -0.6%라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달 발표한 속보치(-0.9%)보다 0.3%포인트 높아졌지만 1분기(-1.6%)에 이어 2개 분기 연속 역성장이다.
연준은 고용시장이 탄탄하다는 점을 들어 경기 침체 상황으로 보지 않지만 불안한 지표가 잇따르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이 조사한 미국의 8월 제조업·서비스업 합성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5.0으로 전달 47.7보다 떨어지며 2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 지수가 기준치 50을 밑돌면 경제활동 위축을 뜻한다.
미국의 주요 부동산정보업체 질로우가 발표한 7월 주택 가격은 전달보다 0.1% 떨어졌다. 이는 10년 만의 하락으로, 주택시장도 위축 조짐을 보인다.
유럽의 경기 침체 우려는 한층 커지고 있다.
S&P 글로벌의 8월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합성 PMI는 49.2로 전달 49.9보다 내려가며 18개월 만에 최저치를 나타냈다.
블룸버그 산하 경제연구기관인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유로존이 치솟는 에너지 비용 부담 속에 침체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진단했다.
러시아 국영가스회사 가스프롬이 유럽행 천연가스 공급관인 노르트스트림-1의 유지 보수를 내세워 이달 31일부터 사흘간 가스 공급 중단을 예고하는 등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때문에 유럽 경제에 찬 바람이 불고 있다.
가뭄으로 수력발전소 가동을 멈추거나 축소하는 등 에너지 수급난이 심해지고 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 경제의 성장세도 약해지고 있다.
중국 경제는 올해 1분기 4.8% 성장했지만 2분기에는 0.4% 성장에 그쳤다. 2020년 2분기(-6.8%)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제로 코로나’ 방역 정책의 영향이 컸다.
중국의 부동산시장 침체와 부동산 개발업체들의 대규모 부채 리스크, 폭염·가뭄으로 인한 전력난과 전기차용 리튬배터리 생산 허브인 쓰촨성의 공장 가동 중단 등 악재가 이어지고 있다.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올해 중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3%에서 3%로, 노무라는 3.3%에서 2.8%로 하향 조정했다.
중국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정책금리 인하와 함께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특별 대출, 사회기반시설 대규모 투자 등을 추진하고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중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리스크와 제로 코로나 방역 장기화 등으로 과거와 달리 경기 안정 정책 효과는 미약해졌다”며 “각종 대외 불확실성 확대는 중국 수출 경기 둔화 리스크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한국 무역적자 지속 우려…경제 성장 기대치 하향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세계 경기 후퇴는 큰 부담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에너지 수입액 급증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불어난 가운데 주요 교역 상대국인 중국, 미국, 유럽연합(EU)의 경기 부진은 우리나라의 수출 둔화나 감소 요인이다.
올해 무역수지가 4~7월 넉 달 연속 적자를 낸 데 이어 이달 1~20일 무역적자가 벌써 102억 달러를 기록했다. 최대 교역 상대방인 중국과는 이번 달까지 4개월째 무역 적자가 우려된다.
국회예산정책처 김용균·최세중 분석관은 지난 17일 ‘최근 무역수지 적자 원인과 향후 전망’ 보고서에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교역조건 악화, 중간재 위주의 수입 구조가 무역 적자 원인”이라며 “글로벌 경기 침체가 지속될 경우 무역 적자가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평가했다.
원화 가치 하락(원/달러 환율 상승)은 예전과 같은 수출 증대 효과를 내기보다는 수입 비용을 늘려 물가를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더 크게 내고 있다.
경제 성장 기대치도 낮아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25일 고물가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연 2.50%로 0.25%포인트 올리면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7%에서 2.6%로 낮췄다. 내년 전망치는 2.4%에서 2.1%로 하향 조정했다.
경기보다 물가에 우선순위를 둔 한은은 이 같은 전망치가 잠재 성장률(2.0%)보다 높다는 점을 들어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를 일축했지만,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전반적인 경기 부진 속에 물가가 오르고 있어 현재 스태그플레이션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미국과 중국, 유럽 등 대외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한은 전망보다 더 낮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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