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림족호이 아세안 사무총장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해 국제평화와 번영을 위한 아세안의 역할과 입장에 대해 브리핑했다. 아세안·유엔 안보리 간 협의는 아세안 52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베트남의 제의로 성사됐다. 2020~2021년 유엔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이며, 마침 1월 안보리 의장국이기도 한 베트남의 외교 행보가 돋보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급속히 확산하면서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는 아세안 의장 자격으로 아세안의 공동대응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지난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는 아세안 외교장관회의와 중·아세안 특별 외교장관회의가 긴급 개최됐다. 코로나19 사태가 미칠 경제·사회적 영향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정보 및 관리 사례 공유 △정책 대화 강화 △전염병 예방·관리 등 보건협력 강화 △백신 및 의약품 개발 촉진 △중소기업을 포함한 경제분야 지원 강화에 합의했다.
‘결속하고 대응하는 아세안.’ 베트남이 아세안 의장국으로서 내건 올해의 슬로건이다. 베트남은 △아세안의 역할 강화 △아세안의 통합 및 연계성 강화 △아세안의 인지도 및 정체성 증진 △역외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 △아세안의 역량 강화 등 5대 중점과제를 제시했다. 아세안의 단합과 결속을 통해 보다 강력한 아세안을 구현하고,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겠다는 의미다.
국가경쟁력지수도 급상승
아세안은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공산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5개 자유주의 국가가 1967년 창설했다. 동남아 자유주의에 위협 요인이던 베트남이 이제 아세안 의장국으로서 아세안 발전을 이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1990년대 들어 탈냉전과 세계화가 진전되자 아세안은 이념적으로 대치했던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를 차례로 받아들였다. 1975년 공산통일을 이뤘으나 경제 실패를 거듭하던 베트남은 1986년 전면적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머이(쇄신)’를 채택하면서 크게 변화했다.
1992년 한국과 수교한 데 이어 1995년에는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아세안의 일곱 번째 회원국이 됐다.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세안공동체 발전을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는 아세안을 보면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국가 지도자들의 예지와 통찰력이 엿보인다.
지난해 베트남 경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미·중 무역전쟁 등 보호무역주의와 세계경제 둔화 속에서 거둔 성과여서 더 빛났다. 최근 20년간 매년 5% 이상 성장한 베트남은 지난 2년 연속 7%대 고성장을 이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800달러로 증가했다.
교역은 5000억 달러 목표를 초과 달성했고, 111억 달러의 역대 최대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아세안 국가 중 가장 많은 자유무역협정(FTA)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베트남은 지난해 외국인투자 380억 달러(승인 기준)를 기록하며 국가경쟁력지수 순위도 급상승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영기업의 구조조정과 민간부문 활성화, 부정부패 척결, 4차 산업혁명 기술 기반의 신성장산업 육성, 교역·투자 협력 다변화 같은 난제가 있다. 아세안 의장국으로서도 미·중 경쟁하의 아세안 중심성 강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둘러싼 긴장 완화 및 행동규칙(CoC) 논의 진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타결 등 어느 하나도 녹록지 않다. 지난해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을 교훈 삼아 북한을 어떻게 국제사회로 이끌어낼 것인가도 관심사다.
베트남은 올해 아세안 의장국과 유엔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지위를 활용해 국제무대에서의 역할과 위상을 제고하길 원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독립 75주년, 호찌민 탄생 130주년, 베트남전 승전 45주년 등 기념비적인 해다.
푹 총리는 2045년까지 고소득국가(1인당 GNI 1만2376달러 이상) 반열에 올라서자는 원대한 꿈을 제시했다. 우리에게는 핵심 파트너인 베트남과 양자 협력관계뿐 아니라 신남방정책의 성공적인 추진, 나아가 국제무대에서의 전략적 공조를 강화해 나갈 절호의 기회다.
한·베트남 전략적 공조 강화할 기회
코로나19 사태 장기화가 우려되고 있다.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은 과거 사스, 메르스 사태 때보다 심각해 보인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분석에 의하면, 중국산 중간재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아세안 국가 중에서는 베트남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트남에 진출한 전기·전자, 자동차·기계, 섬유·의류 분야 한국 기업들도 부품·원자재의 20~25%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어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 위기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중국에의 과도한 의존도를 줄여 글로벌 공급망을 다변화한다는 점에서 신남방정책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