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은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갯소리입니다. 저 역시 ‘동의해요’를 눌렀습니다. 2020년은 저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추억을 남겼습니다. 처음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터졌을 때, 설마 인도네시아까지 확산이 될까 싶었습니다. 그저 일시적으로 잠깐 앓다 잠잠해지는 감기 정도로 생각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첫 확진자가 터지고, 제가 머무는 곳으로 확산이 될까 싶어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좁은 방안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주만 진행될 줄 알았던 온라인 수업이 한 달, 두 달 지속 되자 점점 지쳐갔습니다. 1월까지만 해도 매달 참여하던 수학과 과학 경시대회와 토론대회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가방을 집어 던지고 뛰어들던 아파트의 수영장마저 닫혀서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 시간이 부족해 읽지 못했던 책을 모두 읽어버리자는 마음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상하게 공허해져만 갔습니다. 유튜브에서 본 베이킹이나 요리를 따라 하며 느끼는 즐거움도 잠깐뿐이었습니다. 저는 가족들의 힘듦을 포용할 여유도 없이 제가 힘든 것에만 무게를 두었습니다.
매년 여름이면 들르던 한국도 낯설었습니다. 영화관에 가서 신작 영화 모두 보기,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종일 앉아서 책 읽기, 동대문 쇼핑 등, 1년 전부터 세웠던 소소한 계획들이 무산되자 무기력한 일상이 계속되었습니다. 문득문득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저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습니다. ‘코로나블루’가 이런 것일까요.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밀린 과제를 하며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기사 한 꼭지를 접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저소득층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옷으로 천 마스크를 만들어 쓰거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마스크 없이 생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인포스트》의 기사 한 편이 저를 무기력증에서 건져냈다고 하면 과장하지 말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기사를 읽은 뒤, 코로나 감염증 사태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사회의 취약계층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제가 할 수 있는 기부 계획을 세웠습니다. 용돈을 탈탈 털어 온라인에서 재료를 구입해 50개의 수제 마스크 목걸이를 만들었습니다. 300개의 마스크 목걸이와 350장의 Kf94 마스크를 구입해 인도네시아로 돌아왔습니다. 공항 입국장에서 마스크도 캐리어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분도 기부용이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다니는 Sinarmas World Academy에서 후원하는 자선단체들에 기부할 수 있었습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다는 말처럼 기부를 통해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자 재인도네시아 한인회에서 시행하는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축하 UCC 공모전’에서 우승해 상금을 꼭 따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머무는 두 달 동안 택시 운전기사와 지하철 승객,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축하 영상 촬영을 부탁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학교 친구들과 아빠와 엄마 회사의 동료분들에게 영상을 요청했습니다. 3개월간의 노력 끝에 UCC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상금 전액에 저의 남은 용돈을 보태어 학교에 기부할 수 있었습니다. 아는 동생이 뭐가 남는다고 그걸 기부하냐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제겐 상금보다 더 큰 것이 남았습니다. 마음을 담은 기부로 어영부영 지나가던 저의 2020년에 반짝이는 기억의 조각 하나가 박혔습니다.
며칠 전 인도네시아에서 한인들의 건강을 책임지시는 한 의사 선생님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꿈인 저의 열 가지 질문에 꼼꼼하게 답변해주시는 선생님을 보며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더욱 굳혔습니다. 몇 시간 뒷면 시작되는 2021년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겁니다. 내가 뛰면 세상도 뛰고, 내가 멈추면 세상도 멈추니까요!
《한인포스트》 독자님들, 정선 대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