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인도네시아 5월 민주화 운동

2014‎년 ‎5‎월 ‎5‎일 ‎월요일

1997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1998년 5월 13일 인도네시아 폭동사태
아직컷 인도네시아 폭동으로 규정
‘ini milik pribumi’ 쓰인 건물 무사통과
5.13폭동은 주로 화교대상으로 피해 극심
자카르타 수방사령관과 특전사 사령관 관할
달러당 2,600 루피아가 18,000루피아까지 치솟아
수입업체 줄도산, 전자 봉제 신발사는 큰 수익으로 기반잡아
5월 21일 수하르또 대통령은 하야 선언… 정권 인계

 

Jakarta_riot_14_May_1998

 

1997년에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은 1년 후 1998년 5월 13일 인도네시아 민주화에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원로 한인동포들은 말한다.

32년동안 수하르토 대통령은 독재통치를 하면서 경제부흥을 꾀하였지만 민주화 발전에는 장애가 되었고, 5월 운동으로 철권 수하르또 대통령은 하야하게 된다.

양국의 5월 민주화 운동의 차이점은 대한민국은 5월 민주화운동으로 지정을 받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와 관련단체는 아직도 폭동(KERUSUHAN 끄루수한)으로 규정하고 있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1998년 5월 13일에 서부 자카르타지역에서 시작 폭동으로 자카르타 사방은 불타는 연기와 냄새로 자카르타를 뒤덮었다고 한인동포들은 말한다.

위자야 사는 이모 한인동포는 “5월 13일부터 시작된 폭동에 한국으로 도망가야 아니면 남아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자카르타 폭동은 5월 13일을 시작으로 15일까지 중부 자카르타 스넨 시장, 서부 자카르타 글로독 시장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폭동들은 점포에서 물품들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사진상단> 피해지역 주민들은 집밖으로 나설 수 없어 거리들은 무덤처럼 정적만 남았다.

5.13 폭동에서 폭도들은 시장, 건물뿐만 아니라 여자들을 강간하고 죽였다고 당시 현지 언론은 전했다.

JAKARTA AFTER SUHARTO'S RESIGNATION
당시 김모씨(65세 남)는 “하지만 ‘ini milik pribumi’(이것은 원주민 소유)라는 글씨가 쓰여진 건물들은 폭도의 대상에서 무사했다.

5.13폭동은 주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5.13 폭동 때, 경찰들은 폭동 진압에 실패했다. 실제로 폭동을 방지할 수 있는 군사력이 있었으나 군사력이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 자카르타 수방사령관은 샤프리 샴수딘 장군이었고 육군 특전사 사령관은 현 그린드라당 총재인 쁘라보워수비얀또 장군이었다.

콤파스 신문은 자카르타 수방사령관과 특전사 사령관은 폭동을 방지에 특별조치가 너무 약했다고 보도했다.

대학가에서는 32년 독재를 하고 있는 수하르또 정부를 하야하라고 연일 데모했다. 최근 인권위원회는 프라보위 수비얀또 후보에게 5.13 데모 당시 실종된 13명 대학생들에 대해서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1998년 5.13 폭동의 원인은 1997년 아시아에서 경제위기가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루피아화가 폭락하고 달러는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이에 유류가가 폭등하자 수하르또 대통령은 유류보조금을 인상하자 국민들은 수하르또 정부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대학생과 사회단체는 수하르또 정부를 Orde Baru(신정부)라고 외치며 데모했다.

당시 무역업을 하던 정모씨는 “당시 달러당 2,600 루피아가 18,000루피아까지 치솟자 수입을 하던 많은 업체들이 도산했고, 수출하던 전자 봉제 신발사들은 커다란 수익을 얻어서 회사기반을 갖추고 기반을 갖추었다”고 회상했다.

5월 13일에 시작된 폭동은 자카르타를 비롯해 메단, 솔로 등에서 발생했다. 마침내 5월 21일에 수하르또 대통령은 하야를 선언하고 하비비 부통령에게 정권을 인계했다. (사진하단)

<글.한인포스트 편집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