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암바라와(Ambarawa)

여행이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드디어 9월15일, 이른 아침, 한국문인협회 인니지부(문협)회원들은 소풍을 떠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수카르노하따공항 제3터미널 스타벅스로 모여들었다. 모닝커피로 새벽졸음을 쫓으며 자바문학기행의 목적과 해야 할 일들을 짚어본 후 스마랑 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 도착지 비행기 트랩을 내릴 때마다 새로운 공기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소리지르는 내 습관적 행위를 암바라와 위안소 유적지를 찾아가는 무거운 여행길에서는 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문협일행이 탄 버스가 스마랑 시내를 벗어나 달리는 동안 귀로는 한상재고문의 해박한 암바라와 역사해설을 미리 들었다. 눈으로는 달리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자띠나무숲, 커피농장, 시골마을 풍경들을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즐겼다. 낮은 산들을 지나 한참 달려온 버스가 짙은 초록빛 벼들로 가득한 넓은 들판으로 들어섰다.

산줄기를 타고 내리는 물이 풍요롭다는 자바의 넓은 들판, 드문드문 보이는 농부들의 모습이 무척 평화롭게 보이는 땅을 천천히 지났다. 우리의 어두운 역사인 일제 강점기시절, 50여일 긴 날을 배 멀미로 고생하며 이곳 인도네시아 자바땅까지 와서 다시 군용 트럭을 타고 이 길로 끌려갔을 23명의 조선소녀들을 생각했다. 모든 소녀들이 그렇듯이 그녀들도 고향에서는 아름답고 소박한 꿈을 꾸고 자랐을 것이다.

자신들이 이 암담한 역사의 비극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 당시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조선소녀들이 이역만리 남의 나라 전쟁터 위안부로 끌려가는 순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며 분노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주인은 백성들이다.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고 나라를 지켜달라고 왕이라는,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만들어 나라를 맡겨 놓았던 것이다. 그 임무를 다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다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들은 점령국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암바라와(Ambarawa) 군부대 영내 길을 한 참 돌아 위안소가 위치한 포로수용소 정문 앞에 내렸다. 식민통치 시절 네델란드인들이 농산물 수탈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는데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들이 전쟁에 진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사용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왼 편으로 3~4미터 통로를 가운데 두고 줄지어 늘어선 2층 붉은 벽돌 건물은 성벽처럼 압도적 무게로 다가왔다.

마치 유럽여행 길, 어느 도시국가 유적거리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호텔 식 포로수용소였다고 한다. 이 수용소 긴 건물 중간에 아치형 통로 앞에 선 우리 일행들에게 숙연한 기운이 흘렀다.

통로를 지나 수용소 건물 밖으로 나오니 허름하고 긴 건물이 나타났다. 낮은 지붕 긴 창고 같은 건물이다. 이곳이 나라 잃은 백성들의 꽃다운 딸들이 침략자 일본군들에게 치욕을 당해야 했던 암바라와 비극의 현장이다.

저 지붕 밑 통로 앞에는 번호표를 든 일본군들이 줄 서 있었을 것이고, 몸 씻을 물 조차도 없는 방안의 조선소녀들이 저 무덤 바닥같은 습기찬 시멘트 위에 담요 하나 깔고 누워 시커먼 천정에다 진달래, 복숭아 꽃 고향 땅, 가족들, 친척,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보며 힘든 시간을 견디었으리라.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몇 명의 소녀들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흔히들 장교는 어느 나라를 가도 국제신사라고 불려진다. 명예를 가슴속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장교 신분이다. 이곳에서 욕정풀이를 마치고 바지춤 올리며 다음 순서 기다리는 장교들 사이로 히죽거리며 지나가는 비굴한 일본군 장교모습을 상상해 보니 이 무거운 답사의 무게를 줄여준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이런 장교들을 과연 국제신사라고 내 놓을 수 있을까? 하긴 이런 반 인륜적 제도를 만들어 운영한 것도 도덕성 없는 일본이라는 나라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리라.

무능한 나라였던 조선 지도자들은 조선소녀들이 이역만리 전쟁터 위안부로 끌려가도 막아 주지 못했다. 그것이 우리의 나라가 소녀들의 가슴에 박은 첫 번째 못이다. 전쟁 후 일본인들은 돌아가는 귀국선에 자기 나라 사람들만 배에 태우고 돌아갔다. 자신들이 끌고 와서 부려 먹었던 조선 소녀들은 사용이 끝난 폐기물처럼 이 땅에 버리고 떠났다.

지옥 같은 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버텨왔던 이 소녀들에게는 고향 땅으로 데리고 가 줄 조국이 없었다. 이것이 나라가 조선소녀들 가슴에 두 번째 박은 못이다.

세 번째 못은 같은 동포들이 박았다. 돌아가지 못한 조선 소녀들은 이 땅에서 3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며 중년여인으로 그리고 할머니로 늙어 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꿈에 그리던 조선(한국)이라는 나라도 이제 힘을 기르며 이 땅으로 하나 둘 진출해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반가웠을까? 조선이라는 말만 들어도 반가워했던 이 할머니들, 그러나 반가움에 찾아 가 본 한국인들은 이 조선소녀 할머니들을 외면했다.

같은 동포라 해도 이제 다가설 수 없는 벽을 느낀 조선소녀 할머니들은 이 땅 어디론가로 숨어버린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딱 한 분만 빼고. 아마 여기 저기 흩어져 들풀처럼 살다가 사라져 갔으리라.

남의 나라로 끌려갔다 돌아 온 같은 동포 여인들의 아픔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우리민족의 이기적 풍습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원나라(몽고),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시선은 몽고, 만주 찬 서리보다 더 싸늘했다고 전해진다.

환향녀라는 말,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고향으로 돌아 온 여자라는 좋은 뜻이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 말을 몸 팔았던 여자라는 뜻으로 사용했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사람들은 품행이 좋지 않은 여자를 보면 환향녀, 경상도에서는 화양녀 라고도 했다. 이 얼마나 뿌리깊은 비인간적 냉대의 말인지 알 수 있다.

조선소녀 할머니들의 가슴에 박혀있는 못들은 그 무엇으로도 치유 할 수 없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깊은 상처라는 생각이 든다. 만에 하나라도 그 아픈 상처를 더 아프게 하는 일이라면 비록 그것이 우리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이곳 머나먼 적도의 땅에 방치되었던 우리 조선소녀들의 아픔을 알고 있을 그 시절 고향의 봄날에 피어난 꽃들은 어떤 빛깔이었을까? 아니 빼앗긴 들에도 과연 봄은 오기나 한 것일까?

나는 이곳 인도네시아 땅에서 사업을 위하여 살아 온지 어언 수 십 년이 되었지만 아무리 세월이흘렀다해도 우리민족인 조선소녀들의 아픈 역사의 현장인 이곳 암바라와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바람의 벽을 세운 모진 세월 앞에서, 그들의 아픔이 새겨져 있는 차가운 벽돌 앞에서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우리 문협일행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추억도 쌓고 답사여행도 할 수있는 행복한 세상을 만난 것에 감사한다. 나라를 빼앗겼던 아픈 시대의 희생양인 조선소녀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차마 암바라와에서는 우리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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