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열리는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트라우마 같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세안 국가 정상 간 1 대 1 양자 회담을 할 때 통역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 회담의 경우 아세안 정상 대부분이 자국어로 대담하기 때문에, 자국민 가운데 한국어를 잘하는 통역을 대동해오고, 우리 측은 반대로 상대 아세안 국가의 언어에 능통한 통역자원을 배석시킨다. 문제는 아세안 국가 측이나 우리 측 모두 현실적으로 정상 회의 통역에 충분한 실력을 갖춘 인재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양자 정상회의에서 협의, 합의, 제안되는 내용은 구속력 여부를 떠나 양국 정부가 신뢰를 걸고 이행해야 하는 중요성을 가지므로 경우에 따라 내용이 5%만 오역이 돼도 심각한 혼선과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어 전문가인 필자가 지난 30여 년간 지켜본 한·인도네시아 정상회의에서 통역 만족도는 70~90%에 그쳤다. 다른 아세안 국가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런 현실이 지속되는 이유는 첫째, 외교부나 청와대 책임자가 아세안 국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역이 적합한 의미를 지닌 단어를 선별할 수 있는지, 문법에 맞는 격조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지 등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어서다.
한마디로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둘째, 통역 요원이 스스로 부족함을 인지하고 사양하려 해도 아세안 측에서 영어를 원치 않으니 대안이 없는 경우도 있다.
셋째, 외교부나 청와대 인사가 누가 잘하는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부 야심가가 정상회담 통역을 개인의 스펙을 쌓는 기회로 여기고 인맥을 총동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력을 속이고 무리하게 자청하는 경우다. 의외로 이런 사례가 많았고, 가장 위험한 경우 중 하나다.
이번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를 앞두고 통역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는 것은 아세안을 파트너로 하는 신남방정책을 주요 국가정책으로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특수 외국어 통역 부실 문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2017년 5월 하순 메가와티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로 문 대통령을 예방한 적이 있다. 당시 환담 자리에서 있어서는 안 될 해프닝이 발생했다. 필자가 대통령 통역을 중단시킨 일이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의 이야기를 한창 통역하는 사람을 중단시키는 일은 특별히 중대한 이유가 없으면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당시 통역은 너무나 중대한 실수를 하고 있었다. 문 대통령이 대북 정책 기조를 메가와티 전 대통령에게 설명하는 대목이었는데, 정반대로 통역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결국 대통령의 양해를 구해 통역을 중단시킨 뒤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주었다.
국익과 직결되는 주요 내용이 논의되는 정상회담에서 양질의 통역은 성공과 직결된다. 이번 부산에서 개최되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도 통역 문제가 성공을 저해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하루아침에 우수한 통역관이 양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수 외국어 전문가 양성이 어려운 것은 아세안 국가의 통역관에게는 한국어가 너무 어렵고, 우리 통역관의 입장에서는 아세안 국가 언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지 않고, 열심히 실력을 연마해도 영어 능통자보다 승진이나 보수 등의 면에서 차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력에 바탕을 둔 강성 파워(Hard Power)만으로는 국익 관철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대화와 포용에 바탕을 둔 연성 파워(Soft Power)를 중시하는 정책을 강화했다. 세계 각 지역 특수 외국어 전문가를 대대적으로 양성하고 있고,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외교부와 청와대는 통역 문제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무겁게 인식하고, 아세안 언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빈약한 인재 풀 가운데서나마 최고 실력자를 선발하는 일을 서두르기 바란다.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의 성공은 통역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신문 10월 31일자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