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현장 지탱한 100만명의 외국인력… 고용허가제 20년의 명암

2004년 외국인 고용허가제 실시 첫 외국인 근로자 입국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4년 8월 첫 시행 후 100만명 입국…올해 16만5천명 도입 예정
제조·건설·농업현장 등서 필수인력…안전·인권 등 과제 여전

2004년 8월 31일 평균 연령 31.5세의 필리핀 근로자 92명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필리핀 국기가 새겨진 흰 모자와 흰 티셔츠를 맞춰 입고 긴장과 설렘 속에 한국 땅을 밟은 이들은 그해 8월 17일 도입된 ‘고용허가제’로 처음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들이었다.

이후 20년간 고용허가제 등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들은 우리 산업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인력으로 자리 잡았다.

저출생 고령화 속에 외국인 근로자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들의 안전과 인권 등을 둘러싸고 해결돼야 할 과제들도 여전히 많다.

◇ 2004년 첫 도입 후 20년간 100만명 입국

12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04년 이후 작년까지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비전문취업(E-9) 비자 소지 외국인 근로자는 96만1천347명이다.

도입 첫해 3천167명에서 지난해 10만148명으로 늘었다.

고용허가제 쿼터가 역대 최대인 16만5천 명으로 늘어난 올해 이미 입국한 이들까지 고려하면 누적 입국자는 100만 명이 넘는다.

올해 2분기 기준 국내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E-9 외국인 근로자는 26만73명이다.

고용허가제는 인력난을 겪는 중소기업 등이 외국인 근로자를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허가해주는 제도다.

1993년부터 운영된 외국인산업연수 제도가 불법체류자 양산과 외국인 근로자 인권 침해 등 여러 문제를 낳자 대안으로 도입이 추진됐다.

인건비 부담 등을 우려한 경영계의 반대 속에 진통을 겪다 2003년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이듬해 도입됐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외국인은 내국인과 동일하게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 등의 적용을 받으며 최대 4년 10개월까지 일할 수 있다.

현재 고용허가제 송출 국가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등 16개국으로, 내년부터는 타지키스탄이 추가된다.

이와는 별도로 방문취업(H-2) 비자를 소지한 중국과 중앙아시아 6개국 동포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특례고용허가제도 있는데, 현재 1만3천727명이 일하고 있다.

E-9 근로자를 고용할 수 있는 업종은 제조업, 건설업, 농축산업, 어업, 임업, 광업과 일부 서비스업 등으로 정해져 있다. 최근 음식점 주방보조로도 고용이 가능해지는 등 허용 업종이 늘어나는 추세다.

내달부터는 서울 시내 가정에 필리핀 가사관리사 100명이 일하는 시범사업도 시작돼 고용허가제의 영역이 더욱 넓어진다.

◇ 외국인 취업자 92만 명…산업현장 필수인력으로

고용허가제 도입 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외국인 근로자들은 우리 산업현장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인력으로 자리 잡았다.

고용허가제 외에도 외국인 선원, 계절근로자, 조선업 숙련기능인력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산업현장 곳곳 빈 일자리에 외국인 근로자들을 채워 넣으면서 국내 체류 외국인 취업자는 지난해 92만3천 명으로, 100만 명에 육박했다.

지난해 기준 전체 외국인 취업자 중 고용허가제인 E-9, H-2 취업자가 36%를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 건설업, 농어업 등 산업현장 곳곳은 외국인 근로자들 없이는 굴러가기 힘든 상황이 됐다.

제조업의 경우 외국인을 제외한 고용보험 가입자 수는 지난해 9월 이후 줄곧 내리막이다. 제조업 중에서도 인력난이 심했던 조선업의 경우 지난해 1∼3분기 새로 투입된 인력의 86%가 외국인력이었다.

건설현장의 외국인도 점점 늘어나 건설근로자공제회의 퇴직공제 현황을 보면 올해 3월 기준 전체 피공제자 중 외국인이 16.2%를 차지하고 있다.

농어촌에서도 외국인력이 없으면 농사도 못 짓고, 고기도 못 잡는다는 소리가 수년 전부터 쏟아져 나왔다.

저출산 고령화 속에 외국인력 도입 외에는 빈 일자리를 해소할 뾰족할 대안이 없다 보니 플랜트 건설업 등 다른 업종에서도 외국인력 고용을 허용해달라는 요구가 계속 나오고 있다.

◇ 기피·위험 일자리 채워…’현대판 노예제’ 비판도 여전

고용허가제는 기존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를 어느 정도 해소하며 산업현장에 외국인 근로자들을 수혈했지만, 여전히 걷히지 않은 그늘도 많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내국인이 기피하는 위험하고 열악한 일자리를 채운 데다, 언어와 문화 등에 한계도 있어 재해 위험 등에 더욱 쉽게 노출된다.

지난해 국내 산재 사고 사망자 중 외국인 비율은 10.5%였다. 전체 취업자 중 외국인 비율이 3.2%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외국인 노동자 중 산재 사망자의 비율이 내국인보다 3배 이상 높은 셈이다.

외국인 18명을 포함해 23명이 희생된 지난 6월 아리셀 화재 참사는 이 같은 위험을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외국인 희생자는 E-9 비자가 아닌 재외동포(F-4) 비자 소지자가 대부분이었으나, 안전교육 사각지대에 놓인 것은 E-9 근로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제도 도입 초기부터 불거진 ‘현대판 노예제’라는 비판도 여전히 나온다.

고용허가제 근로자들의 사업장 변경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최초 3년간 3회, 추가 1년 10개월간 2회에 한해 허용이 되는데, 인권단체들은 이 같은 사업장 변경 제한이 기본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2020년 말 캄보디아 출신 노동자가 한파 속에서 난방도 가동되지 않는 비닐하우스에 머물다 숨지는 등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 바지선 같은 열악한 숙소 문제도 끊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노동계나 인권단체 등은 노동자들이 사업장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노동허가제’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민주노동연구원은 지난해 말 발간한 ‘고용허가제 대안 연구’ 보고서에서 “권리 중심의 노동허가제”가 필요하다며 사업장 변경 자유뿐 아니라 정기적인 산업안전 교육 제공, 숙련기능 인력으로의 변경 조건 완화, 숙소 조건 확인 후 고용허가서 발급 등을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