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 년
나는 어린시절을 농촌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자라왔다. 오랜세월이 흘렀건만 그 정겨운 시골풍경속에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한 아저씨의 모습이 있다.
머리에 번들거리도록 기름을 발라서 올백으로 넘기고 늘 칼날처럼 주름이 잡혀져 있는 바지를 입고 베레모를 쓰고 다녔으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골황토길을 걸어다녀도 먼지 한점 묻지 않은 듯 늘 하얀 구두를 신은 모습이다.
어릴적 처음 그 아저씨를 보았을때 나는 먼 도회지의 여행객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그 아저씨가 매일 마을을 이집저집 너털웃음을 띤채 마실을 다니는 것을 보고 분명 동네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 아저씨는 바쁜 모내기철, 동네 사람들이 허리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모내기에 정신이 없을 때에도 논두렁에 앉아 파이프를 느긋이 꼬나물고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 받곤 했었다.
근심이라고는 없는 표정이였다. 또 모가 한창 자라 푸르게 잔디밭처럼 논들이 변해갈때쯤이면 모포기 사이 사이에 난 피(풀)를 뽑느라 마을 사람들은 분주하기 이를데 없을때에도 아저씨는 한가했다. 작열하는 태양을 밀짚모자 하나로 버티며 온몸이 땀에 범벅이 된채 마을 사람들이 피살이를 할때에도 이 아저씨는 논두렁사이길을 뒷짐을 짓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이 거닐곤 했었다.
구리빛으로 탄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언제나 기름기 가득한 깨끗한 얼굴이였고 진흙묻고 거머리에 물려 가끔은 피가 묻기도 하던 다른 사람들의 흙투성이 바지와는 달리 이 아저씨는 늘 깨끗한 바지에 빛나는 백구두였다. 그 백구두에 흙이라도 조금 묻을세라 늘 발을 조심조심 디디며 다녔다.
그런데 추수때가 되면 이상하게도 이 아저씨의 환한 혈색이 확연히 달라지곤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기쁨가득한 얼굴로 곡식단을 거둘때 이 아저씨는 벼이삭이 없는 쭉정이만 달린 자기 논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느라 얼굴이 기미낀듯 시꺼멓게 타들어 가곤했다.
까칠한 아저씨의 어두운 표정처럼 더 이상 주름잡힌 바지도, 백구두도 빛나보이지 않고 초라하고 창백해 보이는 때였다. 일하기 싫어 남의 손을 빌려 자기 논에 겨우 모내기만 해놓고 남들이 피를 뽑고 정성을 다해 논을 가꾸는 사이, 이 아저씨는 자기 논의 피살이조차 하지 않은채 매일 베짱이처럼 논두렁을 오가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작 추수철이 되자 가꾸지 않은 논에는 피만 섞인 쭉쩡이 벼만 알곡없이 무성히 자라난 것이다.
어린 나는 왜 이 아저씨는 남들이 피땀흘려 자기 논을 가꿀때 도회지 여행객같은 차림으로 논두렁과 남의 집을 오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파이프를 꼬나물고 흥얼거리며 다녔을까? 다른 아저씨들처럼 진흙투성이 바지에 거머리 피까지 묻혀가며 구리빛 얼굴로 자기 논을 돌보았더라면 풍년의 기쁨에 얼굴가득 웃음이 번졌을텐데 늘 아쉽기만 했다.
그리고 커가면서 그 아저씨를 보며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것과 그 때를 놓친 자의 마지막은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인가를 깨닫게 되였다.
그 아저씨는 내게 인생의 풍년을 위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시청각자료가 되어 가르쳐 준 셈이다. 인생의 풍년은 과정이 힘겹고 고통스러워도, 원하는 목표를 향해 제때에 최선을 다해, 마치 논을 가꾸듯 ‘꿈의 밭’을 성실히 가꾸어가는 자에게만 찾아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자아실현이든, 자녀교육이든, 가정일이든, 사업이든 내게 주어진 어떤 일이든간에 눈물을 흘려 씨를 뿌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자에게만 풍성한 기쁨의 단이 안겨지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편 126편 5절)
글/손은희작가
(자타르타 거주 말씀의 샘에서 퍼올린 행복,
하나님의 퍼즐조각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