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 이야기 24 이름을 떼어버려야

경주 어느 주택가에서 수도 검침원이 검침(檢針)하러 한 집에 들렸다가 빨래판으로 사용되고 있는 돌에 각문(刻文)이 있는 것을 유심히 살펴 보니 그것이 200년 전 사라져 행방이 묘연하였던 문무왕릉비의 깨어진 윗 조각이었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꽤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검침원이?” 하고 궁금하여 알아보니 발견자는 ‘신라문화동인회’라는 경주 문화사랑 동인(同人) 모임의 회원이었다는데, 이분의 호기심과 열정을 일깨우고 이에 전문성을 더해준 분들이야 말로 코치라는 직업은 갖지 않았을 터이나 진정한 코치 정신을 구현한 분들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요즘에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억지를 부리다가 미국에게 제재를 받아 엉거주춤 우스운 꼴이 되었지만,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자처하는 중국인, 특히 학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세계 각국이 모두 라틴어에 기원을 둔 공통 원소기호를 영자 표기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은 알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국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소 하나 하나에 한자(漢字) 표기를 고집하고 있는데,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면 이에 해당하는 새로운 한자를 새로 만들어 대응한다.

국제화 시대, 특히 학문의 국가 벽이 허물어 진지 오래된 현대과학의 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국수주의(國粹主義)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여러 직간접 비용이 막대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이를 바꾸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 바탕을 흐르는 생각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근본 요소는 세계/우주의 중심인 중국어로 표시되어야 한다는 기본 위에 서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병적일 만큼 자부심 강한 중국인 학자들이 자기네 나라 말의 자전(字典) 중 남의 나라에서 편찬한 사전을 표절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믿겠는가?

필자도 소장하여 자주 애용하고 있는 모두 열 두 권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이 바로 문제의 사전인데, 중국이 자랑하는 강희자전(康熙字典), 사원(辭源)보다 더 방대하고 정밀하다는 것을 중국학자들도 인정하고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일본인 모로하시 하쓰지라는 분이 눈을 너무 혹사하여 한쪽 눈을 실명(失明)까지 하며 일생을 바쳐 편찬한 것인데, 그 편찬 동기가 도쿄고등사범 시절의 담임 마쓰이 간지 선생이 학생들에게 한 말, “일본의 한자 사전은 쓸 만한 것이 없으니 한번 만들어 보라”는 한 마디였다니 마쓰이 선생은 대단한 코치, 모로하시 씨는 대단히 진국인 고객이었던 셈이다.

동학사(東鶴寺)에서 강백(講伯) 스님들을 모시고 세간(世間)에서 가르치는 ‘리더십’은 이러하니 스님들이 취사(取捨)하여 중생 제도에 활용할 것이 있다면 그리 하십사고, 어줍잖은 강의를 한 일이 있었다. 강의 후 저녁 공양 시간에 앞에 앉아 공양을 마치신 스님과 포교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교를 가르치는데 불교라는 이름을 떼어버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는 말씀을 나누게 되었다. 세상 만사 그저 그러함이 착(着)을 떠나면 바로 불법이니, 부처 떼어버리고 가르침만 보여주는 것도 모든 중생에 대한 설법으로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말씀으로 들었다.

코칭 역시 그러하다. 굳이 코칭 계약하고, 오리엔테이션 거쳐 정기적으로 대면하는 일 않더라도, 상대가 누구든지 그를 배려하고 경청하며, 그가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질문을 그의 언어로 고안하여 물어주고, 그를 위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인정/칭찬/격려하여 용기를 북돋으며, 때로 그의 고착된 사고에 도전하여 ‘기왓장 갈아 거울 만들려는’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시야와 시각을 바꾸어 주는 코칭적 삶의 방식을 너와나 일상(日常)으로 삼게 된다면 굳이 코치니, 코칭이니 이름을 빌어 번거로움을 자청할 필요 없이도 시너지를 이루는 ‘상의성(相依性)’의 세계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상의성’이라 함은 ‘연기론(緣起論)’의 핵심 의미인 ‘상호의존성(相互依存性)’, 줄여서 상의성인데, 이에 대한 유명한 비유가 ‘갈대경[蘆經]’에서 세 개의 서로 의지하고 선 갈대 묶음에 대한 것이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양형진 교수의 글을 원용하면, 물 분자가 물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산소 원자와 두 개의 수소 원자가 서로 의지하여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갈대의 상의성과 뿌리를 같이하는 통찰이라는 것이다.

이번 연재의 리더십 과정에서 잠시 다룬 바 있었던, 스티븐 코비 박사 인간관계 리더십의 성숙(成熟), 마지막 단계로 등장하는 ‘상호의존성’도 그 연원(淵源)을 따져 보면 아마도 그가 섭렵한 동양 철학의 같은 연원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아내가 단골로 다니는 미용실에 따라가서 머리 커트 하던 날, 내 머리를 만져주던 쥴리라는 애칭의 미용사 아가씨에게 물었다.

“쥴리는 솜씨가 특출한데, 이 바쁜 중에 헤어 디자인 공부는 언제, 어떻게 한다지?”

대답 없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었는데, 아마도 성찰 질문이 되었을 것이다.

Untitled-36‘금배지 차라리 떼어버리세요’ 라는 제목으로, 금배지의 문양(紋樣)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국회의원들의 더리적은 특권의식을 꾸짖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2~30년 전까지도 훈장처럼 소중하게 가슴에 달고 다니던 이른 바 스카이 대학생들의 배지가 모르는 새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에 스펙이 중요한 세상이 되어 진짜든 가짜든 스펙을 만들어 붙이느라 새로 등장한 강남 좌파 특권 층이 널 뛰는 꼴불견을 신물나게 보고있게 되었지만… 코칭이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면, 코치도 이처럼 배지를 떼어버려야 진정한 코치가 되는 것이 아닐까?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이란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다. 군군신신(君君臣臣) 부부자자(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이름과 실질을 부합시켜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름을 바르게 짓는 일이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이름에 부합하는 실질이 없으면 바른 이름이라는 것이 허상을 만들 뿐이니 그것을 경계하여야 한다고 풀이 하기도 하는데, 이름을 떼어버린 코치, 내 소견으로는 다만 선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 하겠다.

더 들어가면 모두 무명(無明)의 여섯 가지 거친 번뇌 중 계명자상(計名字相)의 미혹일 뿐이니 이를 떼어버려야 진실에 접근하는 길이 트인다는 뜻이 자못 자명하다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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