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흐르는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나이를 먹고 삶이라는 이름으로 인생을 장식한다. 누구나 멋지고 아름답게 인생을 살아보고픈 소망이 있겠지만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의 차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 녹녹하지 않은 게 인생이다.
음악의 세계에서 감상하는 한편의 교향악처럼 강렬함과 부드러움, 고뇌와 환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삶이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조율하는 유능한 지휘자인지도 모른다.
달리던 택시가 도로 한가운데서 멈추는 가 했는데 갑자기 “끼이익” 파열음을 내며 갓길로 급정거를 한다. 기사는 바짝 성난 얼굴로 무분별하게 끼어들었다 질주해가는 트럭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불시에 일어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나는 앞으로 쏠렸던 몸을 겨우 수습하고 놀랐던 가슴을 다스리느라 차창 밖을 보았다.
가로수 길녘에 하늘 향해 뻗어있는 나무들 속에 구름에 가렸던 햇빛이 ‘쨍’ 하고 다가오는 순간 아픈 상처에 자외선을 쏘이듯 가슴이 쓰려온다.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맞으며 목말라 보이는 여름 나무들을 바라보다 왜 갑자기 ‘죽음’이란 단어가 떠오른 것일까.
어느 날의 평범한 외출이 이세상의 마지막 날이 된다면 가장 마음 아프게 걸리는 것은 무엇일까? 남겨진 가족들일까, 아내 잃은 남편, 엄마 잃고 슬픔에 빠질 아이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풍경은 뜻밖에도 내가 없는 나의 집이었고 주인 잃은 나의 소지품들이었다.
갑자기 나오느라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놓은 책들과 여기 저기 깨알같이 메모해 꽂아둔 메모 쪽지들, 그런데 왜 그 순간 메모지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을까.
언제부터인가 그때그때 잊어버리기 쉬운 기억들을 메모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 가깝게 다가오는 약속, 누군가 내게 들려준 유머나 멋진 단어들, 책 속에서 읽은 아름다운 명언 등,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 또한 감퇴되어 난감했던 적이 많았던 탓이다.
내가 떠난 자리에 그깟 메모 쪽지들이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아마도 그것은 한 친구가 남기고 간 마지막 쓸쓸한 흔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벌써 그 친구를 떠나보낸 지도 어느덧 1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평소에 혈압이 높던 친구는 주기적으로 약을 먹었는데 학생들 논술 지도를 무리하게 하던 그녀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쓰러졌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교통사고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친구는 친척의 연고를 따라 낯선 타국인 인도네시아에 와서 살고 있었다.
아이들을 호주로 유학까지 보내고 어렵게 뒷바라지를 하며 힘들고 버겁게 살고 있던 터였다. 그렇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정겨웠고 모든 이들에게 친절했던 따뜻한 성품이었던 나의 친구, 그녀의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던 그녀의 방에서 소지품들을 정리하며 문득 내 손에 만져진 메모지들, 그녀의 손때가 묻어 있는 메모지들은 자신의 삶, 어느 한 부분에까지 지극히 성실했고 마음을 다했던 그녀의 삶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녀의 삶에 비추어 문득 내 삶을 돌아보게 했고 그녀를 떠나보낸 아쉬움과 슬픔은 오랫동안 내 가슴에 긴 여운을 남겼다.
하루를 마감하며 쓸쓸했던 감정을 적어 놓은 짤막한 글들은 슬리퍼를 신고 잠깐 외출 나간 듯 죽음 따위완 거리가 먼 사람처럼 최선의 삶을 살았던 그녀를 생각하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녀가 남겼던 흔적들이 아프게 떠오르곤 한다.
그일 이후로 나는 외출할 때나 혹은 비행기를 타고 긴 여행을 할 때면 책상 위의 메모지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평소에 입던 옷도 가지런히 옷장에 걸어두고 내 주변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
하루를 살고 있음이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한 예행연습을 하는 것 같아 스스로를 타박하기도 했다.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우연히 남겨진 쓸쓸한 나의 일상이 누군가에게 잊혀 지지 않는 흔적으로 오래 남겨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면 때때로 일몰 같은 슬픔이 밀려온다.
하지만 누구나 흔적을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는 짧은 인생이기에 한번쯤은 값지고 보람 있게 살아 볼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도 해본다.
환한 대낮인데도 장마철 탓인지 먹빛 같은 어둠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다 서서히 빗줄기가 가늘어 지더니 반짝 해가 솟아나고 흩어진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나타났다.
친구의 해맑은 표정처럼 정겹게 다가오는 푸른 하늘은 황홀한 빛을 받아 청아한 호수처럼 넘실거린다.
한낮 기후의 변화는 짧지만 아름답게 살다간 친구의 삶처럼 나에게 무지개로 다가와 쓰린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는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 안에 어떻게 살고자 하는 소망의 샘물 하나쯤은 귀하게 간직하고 있을 듯하다.
다만 그 샘물이 우리의 메마른 삶 속에 어떻게 쓰여 지는가에 따라서 각기 삶의 모습도 달라지고 우리의 흔적도 다르게 남겨 질 것이다.
친구가 남기고 간 삶의 흔적에 대한 기억은 살아가는데 나를 성찰해 주는 좋은 거울이다.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해답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를 다독여주기도 하고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주기도 한다.
서미숙 약력
● 1992년 아시아문학 해외공모전 산문 「날개 짓」 대상
● 월간 [서정문학]수필부문, 월간 [문예사조] 시 부문 등단
● 전) 한국문인협회 인니지부 회장 역임
● 저서 : 산문집 『추억으로의 여행』, 『적도에서의 산책』
시집 『적도의 노래』,
『자카르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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