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강화된 성범죄법안 통과

김채희 / JIS 10

성범죄 법안이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지난 12일 통과되었다. 성범죄 법안 개정은 2012년 처음 건의되었지만, 이슬람 단체의 극심한 반대 때문에 통과되기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주요 변화내용으로는 광범위해진 성폭력 행위의 정의, 처벌 강화, 피해자를 위한 제도 강화 등이 있다.

개정법안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보상과 상담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피해자 증언과 단 하나의 증거만 있어도 수사가 의무화된다.

하원의장 Puan Maharani는 이 법안은 “모든 인도네시아 여성을 위한 선물”이라고 말하며 감동을 표했고, 수마트라에 있는 산토 토마스 대학교 교수 Elizabeth Ghozali 역시 “마침내 피해자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획기적인 법안”이라고 인터뷰하며 개정법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피해자가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기 수월해지는 것은 인도네시아 사회에 널리 퍼진 강간 문화(rape culture)와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을 뿌리 뽑기 위한 첫 발걸음이다.

먼저 강간 문화란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성폭력을 용인하는 환경을 조성해 성범죄가 만연한 환경을 뜻한다. 이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다고 믿으며 성평등이 결여된 가부장제 사회에서 흔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미디어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일상에서 여성이 외모로 평가받는 것, 성폭력 피해자를 더럽혀진 여성으로 낙인찍는 문화 등이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언어에서는 강간을 뜻하는 단어 “memperkosa”를 menggagahi(압도한다) 또는 menodai(오염시킨다)와 같은 단어로 완곡하게 만들어서 쓰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성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만드는 것 역시 강간 문화 형성에 이바지한다.

이번 개정법안을 통해 사회 깊이 자리잡힌 성차별적 이념을 뿌리 뽑을 수는 없지만, 처벌 강화를 통해 성범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명백한 범죄라는 사실은 견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이란 성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뜻한다. 20세기 페미니즘의 선두 주자로 잘 알려진 영국 여성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책 ‘자기만의 방’에서 주인공은 신문을 읽으며 “지구에 잠깐 들른 방문자라도 이 신문만 보면 영국은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씁쓸하게 말한다.

안타깝게도 버지니아 울프가 읽어낸 사회는 한 세기가 흐른 지금도 여전하다. 여성이 피해자인 성범죄 뉴스는 가부장적인 시선에 기반해 “짧은 옷을 입었다”, “술에 취해있어 저항하지 않았다”, “위험하게 밤길을 혼자 걸었다” 등의 사실을 부각하며 피해자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

이에 더불어 남성 필자의 시선에서 불필요하게 여성 피해자를 부각하고 선정적인 묘사를 사용한다. 실제로 2019년 한국 미디어운동본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기사의 39.8%는 여성 피해자가 제목에 부각됐으며,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선정적인 제목을 사용했다.

이는 피해자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주는 명백한 2차 가해 행위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권리를 인지하고 피해자에게 경제적, 정신적 지원을 제공하는 이번 법안은 피해자 보호에 필수적이며, 피해자의 무고함을 알리고 피해자 비난을 멈추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이러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법안이 통과되기까지는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수많은 사례와 용기 있게 사회화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2019년, 노동자 사회 보장국(BPJS Ketenagakerjaan) 에서 비서로 일하던 여성이 상사에게 성폭행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언론은 “비서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 이미 성폭행 위험을 자각하고 있었어야 한다”라며 피해자를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2018년 인도네시아 가자 마다 대학교(Gadjah Mada University)의 한 여학생이 동료 남학생에게 성폭행당한 사건에서는 “여학생이 먼저 남학생의 집에 왔다”라는 사실이 피의자를 변호하는 여론을 형성했다.

여자가 남자의 집에 가면 폭행을 당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하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또 다른 피해자 비난의 예시이다. 이러한 예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성범죄를 둘러싼 가부장적 이념 때문에 2020년 기준 90% 이상의 성범죄가 신고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이런 암담한 예시들은 개정법안의 근본적인 효과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더 큰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성폭행은 실수 가 아니라 명백한 범죄라는 것, 여성이 원치 않을 때 끈질기게 관심을 표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스토킹이란 것, 옷과 장소 등에 관한 피해자의 선택은 그들에게 책임(responsibility)을 지우는 게 아니라 단지 취약성(vulnerability)을 높일 뿐이라는 것 등 사회적 인식이 개선될 때까지 인도네시아 및 전 세계의 시민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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