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그곳에 남다

2019 부활절 연합예배 설교

그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한복음 20:10-11, 새번역)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부활”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한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을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태양은 따사롭고 풀은 소생한다.”

한마디로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힘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이 작품의 제목을 “부활”이라고 한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 막으려 하고 또 아무리 부정해 본다 할지라도 새 생명의 부활은 엄연히 존재한다. 봄이 오는 걸 막을 수 없듯이, 부활이 있는 것 또한 막을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얼마 전 강원도에서 큰 산불이 일어나서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분명 그곳에도 부활의 생명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다 타버린 야산이라고 할지라도, 봄은 올 것이고, 생명은 어김없이 새싹을 틔울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며 어두운 밤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영혼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전해져 그들 마음이 큰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힘든 마음을 달래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있다. 빈 무덤을 보기 위해 함께 달려왔던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곧장 돌아가 버렸다. 그들의 골방으로 다시 숨어버렸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 혼자 무덤 앞에 남아있다. 그녀는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던 그녀이기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상황에서 쉽게 발을 옮길 수 없다. 계속 무덤 앞에 서서 울고 있다.

누구나 눈물 지을 때가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고. 그래서 기도해 보지만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마치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고, 내가 버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의연한 척 할 필요가 없다.

울고, 또 울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어야 한다. 신앙의 선배였던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다 토해내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 울며 하나님께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다 쏟아내었다.
그러나 그렇게 눈물을 흘릴 때가 있지만, 신앙인은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소망의 자세도 가져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도 눈물을 흘렸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기로 했다. 그것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든 것이다.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이다. 끝까지 남아 있었던 바로 그 자리. 그 자리는 믿음의 자리였고, 소망의 자리였고, 부활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었다.

어려움이 닥치고, 고난이 오고, 주님이 없는 듯한 상황을 만나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할지라도 부활의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져버리지 말아야 한다.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새 소망을 주신 주님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그렇게 끝까지 견디며 그 자리를 지켜 나갈 때 부활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보이셨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오늘 본문의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베드로, 도마, 요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들 모두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한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빌라도에게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이 문제에 대해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교회의 타락을 꾸짖고 주님 앞에 바로 서자고, 성경 말씀 앞에 바로 서자고 외친 본회퍼 목사가 훌륭한 대답을 해 주었다.

세상은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 늘 부정적이고 세속적인 눈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빈 무덤을 보고도 제자들의 속임수이고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만약 부활하신 주님이 세상에 직접 나타나 보이셨다고 해도,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볼 뿐이지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럼 왜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부활의 몸을 보여 주셨을까? 부활이라는 사건이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기적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기적이라는 걸 믿는 자에게만 부활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아직 자신을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드러내지 않으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바로 그 순간이 이 세상의 종말이며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숨겨진 영광을 가지고, 그를 따르는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신다고 말한다.

그렇다. 부활 사건은 믿음으로만 고백할 수 있다. 부활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님이 부활하셨다. 나도 주님의 부활 안에 살아갈 수 있다. 내 인생도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부활의 은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믿음의 자세였다. 그 믿음의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중략-
막달라 마리아. 눈물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때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새로운 세계가 그녀에게 열렸다. 부활의 세계가 열렸다.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힘이 생겼다. 우리 모두의 삶에 이런 놀라운 부활의 은총이 임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