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만의 의대 증원…비수도권 82%·경인권 18%·서울 ‘0명’
의료계 “총선 앞두고 정치적 카드”, “해부 실습도 제대로 못할 것”
강경 vs 대화 ‘분수령’…전공의·의대생·개원의·의대교수 모여 대책 논의
한국 정부가 20일 기존보다 2천명 늘어난 2025학년도 의과대학 학생정원을 공식 발표하면서 27년 만의 의대 증원에 ‘쐐기’를 박았다.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과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 뒤이은 의대교수들의 집단사직 예고에도 불구하고 ‘2천명 증원’을 확정 지은 것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의사단체들은 “교육 여건을 철저히 무시한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며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지만, 정부가 대학별 배분까지 마치며 증원을 확정한 만큼 의사들 사이에서 ‘협상론’이 고개를 들 가능성이 있다.
이런 가운데 이날 저녁 전공의, 의대생, 개원의, 의대교수 관련 4개 의사 단체가 함께 온라인 회의를 열 계획이어서 결과가 주목된다.
◇ 7개 거점국립대 정원 ‘200명’으로 확대…소규모 의대 대폭 증원
정부는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2천명 증원을 확정지었다. 한 총리는 “의과대학 2천명 증원은 의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숫자”라며 “내년부터 2천명을 증원하더라도 우리나라 의대의 교육 여건은 충분히 수용 가능하다”고 밝혔다.
교육부가 내놓은 ‘2025학년도 의과대학 학생 정원 대학별 배정 결과’에 따르면 정부는 기존에 여러 차례 강조했던 대로 지역의료 인프라 확충을 위해 비수도권에 증원분의 82%를 배정하고, 경기·인천지역에 나머지 18%를 배분했다. 서울지역 정원은 1명도 늘리지 않았다.
비수도권 27개 대학에는 1천639명을 증원한다. 현재 2천23명으로 전국 의대 정원(3천58명)의 66.2% 수준인 비수도권 대학 의대는 내년부터는 3천662명으로 72.4% 수준까지 높아진다.
거점국립대 9곳 가운데 강원대·제주대를 제외한 7곳의 정원이 200명으로 늘었다.
정원 50명 미만 소규모 의과대학은 적정 규모를 갖춰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정원을 최소 100명 수준으로 배정했다. 다른 비수도권 의과대학도 지역 의료여건 개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총정원을 120명에서 150명 수준으로 확대했다.
정원 50명 이하 ‘소규모 의대’만 있었던 경기·인천권의 경우 5개 대학에 361명의 정원이 배분됐다.
수요조사에 참여했던 서울지역 8개 대학에는 증원한 정원을 배분하지 않았다. 의료 서비스 수준이 이미 충분히 높다는 이유에서다.
교육부는 모든 국민이 어디서나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지역완결형 의료체계’ 구축을 위한 3대 배정 기준을 토대로 정원을 나눴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이번 의대 정원이 지역의료 인프라 강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현재 40% 수준(강원·제주 제외)인 의대 지역인재전형 선발 비율을 각 대학과 협의해 60% 수준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 의료계 “증원배정 철회하라…비수도권 집중배정은 ‘정치구호’ 불과”
의사들은 정부가 ‘2천명 증원’을 공식 발표하자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연세대학교 의대와 세브란스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용인세브란스병원 교수 일동은 이날 ‘정부는 의대생 2천명 증원 배정안을 철회하라’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의대 증원 졸속 정책은 우리나라 의사 교육을 후진국 수준으로 추락시켜 흑역사의 서막을 열 것”이라며 “사직서를 내고 휴학계를 제출한 (전공의·의대생 등) 후속 세대 1만5천명을 포기하며 진행하는 의대 증원은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특히 비수도권에 82%, 수도권에 18%를 증원하는 정책은 교육 여건을 철저히 무시한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며 “이는 앞으로 의학 교육 현장에서 혼란을 초래할 독선적 결정일 뿐이며, 총선을 앞두고 교육 생태계를 교란하는 정치적 카드”라고 지적했다.
대한의학회와 26개 전문과목학회도 입장문에서 “정부가 의료계와 합의 없는 독단적 결정을 정의와 의료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며 “정부의 독단적 결정은 의학교육과 전공의 수련체계를 마비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의학회와 26개 학회는 의료계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그들과 함께하며 지원하겠다”며 “정부는 그간의 모든 조치를 철회하고 대화와 협상으로 국민 불안을 해소하고 의료현장의 파탄을 막아달라”고 촉구했다.
대한의과대학 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 역시 정부 발표 직후 성명을 내고 “증원이 이뤄진다면 학생들은 부족한 카데바(해부용 시신)로 해부 실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실습을 돌면서 강제 진급으로 의사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대학에 휴학계 수리를 강력히 요구할 것이며, 휴학계를 반려할 경우에 대비해 행정소송에 대한 법률 검토도 마쳤다”고 강조했다.
집단휴학을 하는 의대생들의 움직임은 점점 커지는 형국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날 하루 전국 40개 의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유효 휴학 신청'(학부모 동의, 학과장 서명 등 학칙에 따른 절차를 지켜 휴학계를 제출) 건수는 11개교, 512건으로 집계됐다.
최근 8일간만 2천926명이 유효 휴학계를 제출했다.
◇ ‘2전3기’ 만에 늘어난 의대 정원…의사들 ‘투쟁 강화 vs 협상 전환’ 갈림길
정부의 의대 증원 결정은 1998년도 입시 이후 27년 만이다. 정부는 2000년대 들어 급격한 고령화로 의사 부족이 예상되자 2018년과 2020년 의대 증원을 추진했으나, 의료계의 극심한 반발과 집단행동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제주대 의대가 신설되며 정원이 늘어난 1998년 이후로 역대 정권은 번번이 의대 증원에 실패해왔다. 오히려 2006년 351명을 줄인 뒤 19년간 동결된 상태다.
현재 의대 정원 3천58명은 30년 전인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3천260명) 시절보다도 적은 인원이다.
정부가 쉽사리 정원을 늘리지 못한 건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의사들의 ‘파업 카드’로 인한 의료 시스템 붕괴 우려 때문이었다.
정부는 2018년 단계적으로 정원을 확대하는 형태의 공공의대를 신설하기로 하고 의대 증원을 추진했지만, 의사단체의 반발로 관련법이 국회 법안소위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20년에는 공공의대 신설과 함께 ‘400명 증원안’을 내놨지만, ‘전공의 파업’으로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정부가 의대 증원을 사실상 확정하면서 의료계는 더 거센 반발을 할지, 증원을 인정하고 향후 의료개혁 과정에서 의료계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대화에 나설지 ‘갈림길’에 서게 됐다.
이미 한 달을 넘긴 의료공백 사태가 한층 더 깊어질지, 봉합되는 수순을 밟을지는 정부가 대화의 문을 닫고 있는 전공의들을 향해 어떤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지가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의료계의 통일된 대화 창구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별다른 대화 노력 없이 전공의들에 대한 무더기 면허정지를 내린다면, 의료계의 극심한 반발로 의료 현장의 혼란과 환자들의 고통만 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의대 교수들은 사직서 제출 시한을 오는 25일로 잡고 집단행동을 예고하고 있으며,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이날 시작한 차기회장 선거가 끝나면 집단 휴원이나 주말·휴일 단축 진료 같은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가운데 이날 저녁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와 의대협, 의협, 전국 의과대학 교수협의회(전의교협) 등 관련 4개 의사단체가 온라인 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조윤정 전의교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이날 기자들에게 “4개 단체가 서로 협의하면서 정부와 마음을 터놓고 함께 머리를 맞대서 현명한 해결책을 찾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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