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크리스쳔 유래

기독교는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이지만, 지역별 소수 만이 형성되어있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약 10%는 현재 크리스쳔으로 간주된다. 이는 약 2,350만명을 차지하는 비율이다. 인도네시아 인들은 가톨릭과 기독교를 분리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인에게 크리스천이나 기독교라는 용어는 개신교를 가리키는 반면, 카톨릭은 다른 종교로 취급된다. 인도네시아는 서양 전통에 따라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모로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 기독교인)라는 용어를 적용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두 종교의 본질을 동일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크리스쳔의 대다수는 개신교이다. 2,350만 명의 인도네시아 크리스쳔 중 약 1,650만 명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나머지 7백만은 가톨릭 신자이다. 이 크리스쳔 공동체는 전국 곳곳에 퍼져 있다. 그러나 아래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사회의 대부분은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적은 동부지역에 위치해 있다.

다수 크리스쳔 공동체가 있는 지역은 다음과 같다 :
1. 북 수마트라  
2. 칼리만탄  
3. 북 술라웨시  
4. 서 술라웨시
5. 몰루카스  
6. 파푸아  
7. 플로레스  
8. 숨바  
9. 서 티모르

– 인도네시아 군도 기독교의 시작

인도네시아 기독교 출현의 첫 번째 알려진 출처는 12세기에 살았던 이집트 기독교인 아부 살리 알 알 미니(Abu Salih Al-Armini)의 백과 사전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글에 따르면, 그 당시 수마트라 서부에는 수목 나무가 생산 된 곳 가까이에 수많은 네스토리안 교회(Nestorian churches)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학자들은 알 미니가 이 위치를 현재 인도의 도시와 혼동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포르투갈이 1511년에 말라카를 점령 한 후, 그들은 테르나테의 술탄이 지배한 몰루카스의 원하는 향신료 심장부를 찾기 위해 동쪽으로 더 항해했다. 그곳에서 포르투갈인은 작은 정착촌을 세웠다.
처음에는 가톨릭 계 포르투갈인과 테르나테 인들의 이슬람교인들 사이의 관계는 양측이 무역에서의 좋은 협력의 이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었다.

1534년 이후 포르투갈의 성직자가 현지인을 가톨릭으로 전환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고 16 세기 말까지 남부 몰루카스 주민의 약 20%가 가톨릭으로 분류되었다. 포르투갈인이 작은 가톨릭 정착촌을 설립 한 동부 인도네시아의 두 곳은 Larantuka(Flores 섬)와 Dili(Timor 섬)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인(향신료 무역 독점을 원했던)과 테르나테 사람들은 몰루카스에서의 전직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네덜란드인 칼뱅파 개신교인들은 1607년 Ternate에서 첫 번째 정착촌을 세웠다. 그들은 또한 향신료 무역을 독점을 원했고 포르투갈인들보다 야망을 성취하는 데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이후 2세기 동안 테르나테의 술탄은 점차 권위를 잃으며,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이 지역에 기독교의 확산이 초래되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 지역의 일부 지역에서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로 약칭 함)가 선교 활동을 지원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미 기독교인인 유럽인을 주로 포함한 공동체를 위한 지원이었다.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대규모 원주민 개종이 지원되지 않았으나 한 가지 정책은 분명했다.

기독교에 이르렀을 때 네덜란드 칼뱅주의 개신교 만이 허용되었다. 이전에 현지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가톨릭 사제들은 해산되었으므로 포르투갈인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화 과정은 VOC 기간(1602-1798)동안 네덜란드인들이 통제 할 때 (거의) 완전히 멈춘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 식민지 시대의 기독교 확산

19세기에 네덜란드가 이전에 VOC의 지배하에 있었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을 때 선교 활동은 여전히 식민지 당국에 의해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이미 개신교 인들의 종교적 필요에만 봉사하는 정부 기관이었다.

그러나 회원 중 일부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전파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인도네시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토착민 개종을 위한 대규모 단체는 18세기와 19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새로 도착한 많은 단체들로부터 왔다. 네덜란드 선교사 협회 (Nederlandsch Zendeling Genootschap)와 독일의 라인 선교사 협회 (Rheinische Missionsgesellschaft)와 같은 기관은 네덜란드 인도 제도에서 그들의 메시지를 전파 할 수 있었다.

유럽의 네덜란드 국가가 세속화되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선교가 인도에서도 활동하지 못하게 막을 수 없었다. 교회와 주의 분리는 종교적 문제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선교 활동이 사적 부문에 맡겨 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체와 수마트라와 같은 무슬림 지역을 제외하고는 1900년에 걸친 선교 활동이 식민지 전역에 수립되었지만 기독교인의 수는 100년 전에 비해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미나 하사(북 술라웨시)와 타파눌리(북 수마트라) 두 개 지역 만이 원주민 개신교인의 수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 주민을 대규모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반적인 ‘실패’는 재정적 수단의 부재, 인력의 부족, 사용 된 방법의 부적절함에 주로 기인한다.

1900년 이후 이 상황은 네덜란드 정부의 새로운 정치적 접근 방식으로 인해 변경되었다. 1900년 이후 영토 확장이 크게 이루어졌고 윤리적 정책 (원주민의 생활 수준 향상을 목표로 함)이 도입되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원주민 사회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른 것들 중에서도 (특히)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네덜란드에서 왔기 때문이다. 인력과 재정적인 수단이 다가올수록 가톨릭 선교 활동은 새로운 영토로 옮겨졌고 그에 따라 토착 가톨릭인의 수도 증가했다. 개신교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네덜란드 인디 족들에게 온 북미 여러 단체들의 후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네덜란드 식민지에서의 선교사 적 접근은 상당히 단편적이었다. 1938년에는 국가 기독교위원회 (National Christian Council)를 설립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지만 제 2차 세계 대전과 인도네시아의 후속 독립은 그 시도를 종식시켰다.

– 현대 인도네시아의 기독교인들

인도네시아에는 명확한 기독교 다수 지역 공동체가 포함 된 지역이 많이 있지만 (위의 지도 참조) 전체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소수 민족 종교만을 형성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다수인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이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은 때로는 실제로 차별 대우를 당한다.) 그 나라에서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다소 약하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기독교인들은 소수 민족의 지위를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무슬림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열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국가와 관련하여 기독교인들은 인도네시아 이슬람교도의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민족주의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통일 된 인도네시아 국가를 유지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급진적인 이슬람교도들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공격하여 인도네시아의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었다. 이 사건은 주로 기독교인이 소수 민족을 형성하는 자바 섬에서 발생한다.

이 상황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인도네시아가 독립 후 ‘기독교화’ 과정을 경험함에 따라 가해자를 대신하여 두려움과 좌절감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실제로 문제의 근원은 식민지 시대에 비교적 큰 기독교 엘리트(더 나은 교육과 경제적 수단을 갖추고 있음)가 네덜란드에 의해 양성됨에 따라 역사상 더 깊어졌다.

인도네시아가 독립 한 후, 기독교 엘리트는 수카르노와 수하르토의 통치 기간 동안 정치(육군 포함)와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의 주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회에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권력 투쟁을 목격했으며, 수하르토가 1966년에 권력을 잡은 후 공산주의자들은 제거되었다.

인도네시아 사회 내에서 이슬람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정부가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혼란스럽고 불신의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반대 세력에 대항하여 숨겨진 의제가 없는 동맹국으로 간주되었다.

이 상황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슬람의 더 엄격한 부분이 정부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온전한 이슬람의 흐름이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더 많은 지지를 얻으려던 수하르토(명목상의 무슬림)가 무슬림 정책을 구현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한 기독교인의 영향력 감소를 암시했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대부분의 무슬림 및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 조화를 이룬다.
수하르토의 몰락과 그 이후1997년에서 2004년 사이 인도네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분류되는 폭력의 소란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오직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수하르토 신좌파의 몰락으로 이 지역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권력에 대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기사자료. indonesia inves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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