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엄은희(지리학 박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지난 2월 11일(일) 이른 아침 자카르타를 떠나 반뜬주 르박군(kabupaten Lebak, Provinci Batennci)의 군청소재지 랑카스비뚱으로 향했다.
9명의 조촐한 우리 일행은 한*인니문화원이 기획한 315차 문화탐방을 가는 길이었고, 주요 일정은 ‘물따뚤리 박물관(Museum Multatuli)’ 개소식 참석 및 소설 『막스 하벨라르 Max Havelaar』에 등장하는 장소와 관련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 작가 에두아르드 도우스 데케르(Eduard Douwes Dekker)가 1860년 발간한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다. 박물관의 이름이 된 ‘물따뚤리’는 데케르의 필명이다.
언뜻 바하사 인도네시아처럼 들리지만, 물따뚤리는 라틴어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다”란 뜻을 지닌다. 소설 속의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관료였는데, 여러 측면에서 작가 자신과 삶의 궤적이 겹친다.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막스 하벨라르와 소설의 저자(필명)인 물따뚤리와 19세기 중반 르박 군의 식민관료였던 데케르는 같은 사람의 여러 자아들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중반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파산(1799년) 후 네덜란드 정부의 의한 식민지 직접통치가 이루어 시작되었던 시기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식민지 경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농민들에게 현금화할 수 있는 커피와 설탕 재배면적을 강제로 할당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식민 대리인(주로 현지인 군수)들을 내세워 세금과 현물을 징수하게 만들었는데, 대부분의 식민지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폭력적 방식이 자주 동원되었다.
현지인들의 식량인 쌀 대신 강요된 상품작물을 생산하느라 자바와 수마트라 섬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다 죽거나 농촌을 탈출하는 주민들이 속출했었다.
소설은 당신 반뜬주 르박 지역에서 자바인들에게 행해진 폭력적 착취를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본국 정부와 유럽 시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누리는 풍요가 식민지의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은 현지인에게 교육과 문화를 제공하는 ‘윤리적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교육개혁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가 싹틀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했던 문인 쁘라무디야(Pramoedya Ananta Toer)가 이 소설을 일컬어 “식민주의에 종지부를 찍은 책”이라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뜬주의 남쪽에 위치한 르박군은 두 개의 하천-Ciberang 강과 Ciujung 강-이 합류하며 만들어 놓은 분지 지역으로 산지와 평야가 맞닿아있어 쌀농사 뿐 아니라 사탕수수, 야자의 재배에도 적합한 곳이다.
르박군은 고속도로 중심의 현대적 육상교통(현 자카르타-므락 고속도로)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다. 하지만, 식민시대 건설된 자카르타-므락(Jakarta-Merak) 간 철도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자카르타를 출발해 정서 방향이 아니라 르박이 있는 남서쪽을 향해 크게 휘어졌다가 다시 북서향해서 자바 섬의 서쪽의 므락에 이른다.
추측컨대 르박군의 랑까스비뚱이 과거엔 농업의 중심지이자 상품작물 재배지로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인구 15만 명의 이 작은 군은 현재 물따뚤리를 콘텐츠로 한 다양한 문화자원을 개발함으로써 국내외 관광을 유치하고 지역의 장소 정체성을 만들어가겠다는 야무진 구상을 실현 중에 있다.
2월 11일에 개장한 ‘물따뚤리 박물관’은 신임 관장이 된 우바이딜라(Mr. Ubaidilah)의 노력과 르박군(군수 Hj. ITI Octavia Jayabaya)의 든든한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지역의 중등 교원이었던 우바이딜라 관장은 대학 시절 『막스 하벨라르』 소설을 접한 후 관련 독서모임을 만들거나 소설 관련 국내외 자료를 모아 온 사람이었다.
15년 이상 지속되었던 그의 개인적 노력은 군청이 일종의 장소마케팅(place marketing)을 위해 물따뚤리에 주목하게 되면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군청 앞 광장(Alun-Alun)의 동쪽에 새로 건축된 박물관은 소설에 관한 내용과 당시 식민세력에 대항했던 농민과 민족주의자들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제법 큰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밖에 데케르가 직접 거주했던 식민관료를 위한 관사(아쉽게도 85퍼센트 이상이 잘려나갔고 보전상태도 좋지 않다), 그의 필명을 딴 거리(Jalan Multatuli), 소설 속 악역의 실제 모델이었을 인도네시아 군수의 무덤 등이 가까운 거리에 모두 자리 잡고 있다.
이 모든 관광자원은 자카르타에서 3시간 남짓 거리에 조성되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식민 시대 인도네시아인들이 겪었던 고통과 이를 벗어나기 위한 농민과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의 역사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그 시대 지배자의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식민 지배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냈으며, 더 나아가 착취 받던 인도네시아인들의 편에 서고자 했던 ‘물따뚤리’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많은 교민들이 물따뚤리 박물관 여행을 통해 한국 사람과 인도네시아 사람 간의 관계맺음에 대해서도 한 번 쯤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져볼 것을 권해 본다.
사족 1> 물따뚤리 박물관을 있게 한 소설 『막스 하벨라르』는 세계적으로 소설 뿐 아니라 공정무역(fairtrade)의 대표적 상표로 유명하다. 1988년 멕시코의 가난한 농민을 지원하던 네덜란드인 신부 프란스 판 데어 호프는 농민들과 함께 막스 하벨라르라는 이름의 무역회사를 만들었고, 농민들이 재배한 커피를 막스 하벨라르라는 상표를 붙여 유럽 시장에 팔았다. 막스 하벨라르는 공정무역 운동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한 최초의 사례이다.
사족 2> 1860년 발간된 물따뚤리의 소설『Max Havelaar』는 현재까지 4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다.(영어판 1868년, 인도네시아어판 1972년) 이 소설은 현재 인도네시아 교민 배동선 작가와 양승윤 교수(한국외대 명예교수)에 의해 공동번역되고, 사공경 원장의 “물따뚤리의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에필로그를 덧붙여 올 상반기 한국어판이 출간될 예정(출판사: 시와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