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청년의 맹세, Sumpah Pemuda의 역사

BBS 10 / 강주영

10월 28일는 인도네시아의 숨빠 뻐무다(Sumpah Pemuda) 날이다. 이번 제 96회 청년의 맹세, 숨빠 뻐무다의 테마는 “Maju Bersama Indonesia Raya” 즉, ‘위대한 인도네시아와 함께 전진한다’였다.

인도네시아 청년의 맹세(Sumpah Pemuda)는 인도네시아의 청년들이 네덜란드 식민 지배에 대항하여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를 주창하는 선언문이다.

이 맹세는 세 번의 회의를 거쳐 결정되었고, 1928년 10월 27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2회 청년 회의에서 선언되었다. 이를 계기로 인도네시아 민족은 다른 나라에 귀속되어 있지 않고 자신들 스스로가 하나로 똘똘 뭉쳐진 주체적인 민족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인도네시아의 독립과 민족주의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2회 청년 회의(Kongres Pemuda)는 1926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회 청년 회의 이후에 열렸다. 숨빠 뻐무다는 인도네시아 학생 연합(PPPI)이 제안을 하였고 청년 단체들이 참석한 제2회 청년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참석 단체로는 Jong Java, Jong Sumatranen Bond, Jong Bataks Bond 등이 있다. 세 번의 회의는 모두 각자 다른 위치에서 열었다.

첫 번째 회의는 1928년 10월 27일 토요일에 Katholieke Jongenlingen Bond(KJB) 건물의 Lapangan Banteng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모하맛 자민(Moehammad Jamin)은 청년과 통합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 설명했으며 그는 인도네시아 통합을 강화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요소로 역사, 언어, 전통 법, 교육, 의지를 제시했다.

두 번째 회의는 1928년 10월 28일 일요일 Oost-Java Bioscoop에서 열렸으며 교육의 문제를 논의했다. 발표자 Poernomowoelan과 Sarmidi Mangoensarkoro는 어린이가 국가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고, 학교 교육과 가정 교육의 균형이 맞춰져야 한다고 했다.

세 번째 회의는 1928년 10월 28일 일요일에 지금은 청년의 맹세 기념관으로 알려진 Gedung Indonesische Clubhuis Kramat에서 열렸다. 이 세 번째 회의에서 청년의 맹세가 발표되었고, 참석한 청년들은 이를 충성의 맹세로 낭독했다.

청년의 맹세가 이루어진 이후, 이는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청년들이 맹세한 이 선언은 중요한 약속으로 여겨지고, 새로운 희망과, 민족의식을 일깨웠으며 식민지 지배에 맞서는 투쟁의 정신을 일깨웠다. 또한, 청년의 맹세는 지역 중심적이던 여러 청년 단체를 하나로 결집해 민족주의 성향으로 변화시키는 다리가 되었다. 이 청년의 맹세를 통해 현재의 청년들에게도 다시 한번 인도네시아라는 하나의 민족과 조국, 그리고 언어를 강조했다.

청년의 맹세, Sumpah Pemuda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Kami Putra dan Putri Indonesia, mengaku bertumpah darah yang satu, Tanah Indonesia.
우리 인도네시아의 자녀는 인도네시아라는 단 하나의 조국임을 선언한다.

2. Kami Putra dan Putri Indonesia, mengaku berbangsa yang satu, bangsa Indonesia.
우리 인도네시아의 자녀는 인도네시아 민족이라는 단 하나의 민족임을 선언한다.

3. Kami Putra dan Putri Indonesia, menjunjung bahasa persatuan, bahasa Indonesia.
우리 인도네시아의 자녀는 인도네시아어라는 통일 된 언어를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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