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계화·기술민족주의… 활력 떨어진 내수 시장 등지고 동남아로

‘제조업 공동화(Hollowing-out)’는 과거 자국 기업의 해외 이전으로 홍역을 치렀던 일본에서 주로 통용됐던 표현이다. 학술적으로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제조업의 생산, 고용 비중이 줄고 서비스 비중이 증가하는 ‘탈공업화’ 현상과 가깝다.

제조업 공동화와 탈공업화는 제조업 비중이 감소한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제조업 공동화는 기업의 해외 이전으로 고용 감소 등 산업 기반 붕괴가 나타나는 부정적 측면이 강조된다. 반면, 탈공업화는 산업 구조 고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통상 제조업 공동화를 가늠하는 지표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의 비중, 해외 직접 투자 규모, 제조업 해외 생산 비중 등을 꼽는다. 지표상으로는 아직 우리 제조업이 공동화의 한복판에 들어섰다고는 보기 힘들다.

한국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에 따르면,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0%대 후반으로 경제 규모가 비슷한 국가와 비교해도 높다. GDP 대비 해외 직접 투자 잔액 비중은 20%대 후반으로 40%대인 미국 등 선진국보다 낮다. 제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은 20% 안팎이다.

문제는 해외 직접 투자나 제조업의 해외 생산이 증가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제조업 해외 생산(매출 기준)은 2010년 2150억달러에서 2019년 3680억달러로 1.7배 증가했다. 앞으로 해외 투자가 지금보다 빠른 속도로 확대된다면 국내 공장의 축소, 폐지 등 산업 공동화 현상이 심화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특히 최근 불거진 산업 공동화 우려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난도 방정식으로 진화했다. 2000년대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을 땐 우리 기업의 중국 직접 투자 급증이 이슈였다.
작금은 미중 패권 경쟁으로 국제 경제 질서가 격랑에 휘말리면서 개별 기업 차원의 이슈를 넘어섰다는 진단이다. 산업 공동화를 촉발시킨 위기 요인을 분석한다.

원인1. 공급망 新질서
美·EU 자국우선주의 심화

미국 인플레 감축법 중 전기차 관련 세액 공제 내용
미국 인플레 감축법 중 전기차 관련 세액 공제 내용

첫 번째 요인은 공급망 신질서 개편이다. 과거 생산 효율성을 중심으로 작동했던 글로벌 공급망은 정치경제 논리를 따라 재편되는 중이다.

1970~1980년대 미국은 자국 경제의 생산 효율성을 추구하며 동아시아 국가들과 전략적인 분업 체제 형성을 주도했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싼 동아시아 국가에 생산기지를 구축한 미국은 아웃소싱을 통한 분업화를 적극 추진했고 거대 다국적 기업이 급부상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다국적 기업의 생산기지를 적극 유치했다.

현 공급망은 기존 질서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 구조가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자국 산업의 극심한 공동화 현상에 시달렸다.

이는 ‘러스트벨트(제조업 부진으로 불황을 맞은 지역)’가 생존을 도모하며 정치 세력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자유무역의 선봉장에 섰던 미국은 이제 정반대의 탈세계화 흐름을 타고 첨단 기술뿐 아니라, 생산기지까지도 본토에 유치할 것을 천명한 상황이다.

자국 부품 사용을 사실상 의무화한 미국의 ‘IRA’에 대응해 EU도 ‘유럽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IRA와 유사한 ‘유럽원자재법’을 준비 중이다.
중국 리스크에 따른 미국 주도의 아시아 공급망 변화 흐름도 주된 요인이다.

이른바 ‘차이나플러스원(China+1)’ 전략으로, 이는 중국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인도, 인도네시아 등 중국 이외 국가로 투자를 다변화하는 전략을 말한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아시아 신공급망 구축 전략이 본격화하는 국면에서 아시아 국가별 수출, 경기 온도 차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중국+α’로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현지 완결형 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우리 제조업의 해외 생산 비중이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본다.

대기업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집중 발주를 통해 원가를 절감했던 기존 공급망 전략과 달리, 유럽과 중국, 인도, 아세안, 북미 등 각 권역 내에서 부품을 자체 조달하는 다변화된 생산 체제가 가속화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국내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심화할 수 있는 만큼 국내 산업 구조는 원천 기술과 서비스업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체질 개선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지상 전 산업연구원장(경북대 경영학과 교수)은 “지금까지는 일본이 소재를 생산하면 한국이 이를 수입해 중간재를 만들고, 중국이 다시 완성품을 생산하는 등 각국이 각자 맡은 역할을 하며 교역을 했지만 이런 밸류체인의 모습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며 “제품 기획이나 신제품 개발, 마케팅, 공장 관리 등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를 적극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인2. 테크노 내셔널리즘
‘기술 블록화’ 가시화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미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사활을 걸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1676억달러(약 218조8800억원)를 투자해 2034년부터 2042년까지 매년 1개의 신규 공장을 가동하는 장기 투자 계획을 밝혔다. 사진은 삼성전자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미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사활을 걸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1676억달러(약 218조8800억원)를 투자해 2034년부터 2042년까지 매년 1개의 신규 공장을 가동하는 장기 투자 계획을 밝혔다. 사진은 삼성전자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두 번째 요인은 기술 중심 산업 구조 대전환으로 빚어진 ‘테크노 내셔널리즘(Techno-Nationalism)’ 즉 기술민족주의다.

미중 전략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 현상이 심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AI(인공지능), 빅데이터, 반도체 등 핵심 기술의 영향력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와 구분된다.

이런 디지털 기술은 경제적 사용과 안보적 사용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므로 주요 국가의 산업이 경제뿐 아니라 안보와 직결되는 경우가 흔하다.

기술 경쟁은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며 기술 개발 방향, 기술 사용과 실현 가능 여부 등을 중심으로 ‘기술 블록화’가 곳곳에서 가시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 ‘테크노 내셔널리즘’이라 명명되는 기술민족주의는 국가 안보,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디지털 동맹, 국제 기술 동맹, 새로운 규범에 대한 블록화 등 다양한 현상을 창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술 블록화’에 대응하려는 기업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에 대비한 전략적 대안을 확보해야 하므로, 각 진영을 대상으로 설비 투자와 생산기지 증설 등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국내 제조업의 해외 생산 가속화와 공동화 현상 심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미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법’이 단적인 예다. 이 법안은 “미국의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위해 중요하다”는 내용을 명시하며 경제 안보의 논리를 명확히 했다.
이 법에 따라 미국 정부의 지원금이나 세제 혜택을 받은 기업은 중국·러시아 등에서 신규 시설을 짓거나 기존 시설을 확장하지 못하고, 어길 경우 지원금을 회수한다.

이런 흐름 아래,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1676억달러(약 218조8800억원)를 투자해 2034년부터 2042년까지 매년 1개의 신규 공장을 가동하는 장기 투자 계획을 밝혔다. 삼성전자의 인센티브 신청서에 따르면 공장 신설에 최소 1676억달러(약 218조8800억원)가 투입돼 82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삼성전자의 테일러 반도체 공장 초기 투자금액(170억달러)의 10배에 달하는 규모다.

원인3. 활력 사라진 내수 시장
스타트업도 동남아서 창업

활력이 사라진 내수 시장도 제조업 공동화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해외로 생산 공장을 이전한 기업 상당수가 내수 시장의 성장동력 부재를 원인으로 꼽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경제 동향과 경기 판단’ 자료를 통해 “2022년 4분기 한국 경제는 수출이 침체되고 내수 활력이 크게 약화되는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차이나플러스원’ 전략에서 동남아시아가 각광받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동남아는 인구 구조상 젊은 층 비율이 많고 IT 기술 이해도가 높아 한국 기업에 매력적인 시장이라는 것이다. 동남아 인구는 7억명에 육박한다.

인터넷 사용자 수는 2021년 기준 4억4000만명으로 2019년(3억6000만명)과 비교해 빠르게 늘었다. 스마트폰 침투율도 100%를 넘는다.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사정이 이렇자 대기업은 물론 스타트업도 동남아로 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네이버 손자회사이자 리셀(재판매) 플랫폼인 크림은 인도네시아 플랫폼 기업인 PT카루니아인터내셔널시트라켄카나(PT카루니아)에 약 20억원을 투자해 지분 20%를 취득한다.

앞서 크림은 태국 사솜컴퍼니, 말레이시아 셰이크핸즈 등 주요 동남아 리셀 플랫폼에도 투자했다.
마켓컬리는 알리바바그룹 산하 동남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라자다 계열사 레드마트에 별도 브랜드관을 열고 상품 판매를 시작했다.

라이프스타일 앱 ‘오늘의집’ 운영사인 버킷플레이스는 2021년 싱가포르 온라인 가구 플랫폼 힙밴을 인수했다. 야놀자의 솔루션 자회사 야놀자클라우드는 본사를 아예 싱가포르에 뒀다.

창업을 한국이 아닌 동남아에서 하겠다는 인식도 확산 중이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최근 창업자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창업자들은 해외 진출을 고려하는 지역으로 동남아(54.5%)를 가장 많이 꼽았다. 북미권(미국·캐나다)과 일본, 유럽 등을 앞섰다.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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