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목숨받친 한국인 독립영웅

박성재 / SIS11

전북 완주 출신 양칠성(1919~1949), 그는 인도네시아를 위해 목숨 바친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으로 불린다.

인도네시아 가룻의 군수가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에 앞장선 기념사업을 추진하던 도중 한국 측의 의견이 엇갈렸다. “자기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운 건데 왜 한국 정부가 기념사업에 참석 해야하나”라는 비판 섞인 의견들에 반면. “징병 끌려가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져야 했던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라는 진실들의 밝혀내야 한다는 입장도 분분하다.

양칠성이 직접 자기 발로 갔는지 아니면 끌려 갔는지는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1945년 8.15광복절에 그는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 왜 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견들도 많지만 가장 믿을 만한 의견은 인도네시아 여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인도네시아에 남아있던 그는 1945년, 인도네시아 독립군의 폭탄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1948, 8월 후반에 네덜란드군에 체포돼 총살됐다.

350년간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은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1942년 점령했다가 1945년 물러가자, 재 점령하려는 네덜란드와 4년간 독립투쟁을 벌였다.

네덜란드군은 휴전이 발효되기 직전인 1949년 8월 10일 자바섬 서부 가룻(Garut)에서 인도네시아 독립군 유격대 소속 포로들을 처형했는데, 그중 한 명이 양칠성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독립 영웅으로 주목을 받는 인물인 한국계 인도네시아인 꼬마루딘 양칠성 이 네덜란드 군인들에게 처형될 당시 인도네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흰색 수의와 적색 숄을 목에 두르고 총살됐다는 기록이 확인됐다고, 한인회 소속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가 밝혔다.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외국인 독립 영웅으로 추서됐고, 인도네시아 역사연구단체인 ‘히스토리카’와 가룻군은 2018년부터 ‘영웅의 날(11월 10일)’에 ‘양칠성 도로’ 명명식을 하고자 논의를 이어왔지만,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히스토리카 회장 아둘 바시드는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데 그중에는 한국인 양칠성도 있었다”며 “젊은 세대는 앞날을 위해서라도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로스티뉴 UI 한국어학과 교수와 누르 아이니 세티아와티 박사는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던 시절에 한국인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양칠성이 어떤 이야기를 가졌는지 설명했다.

한국에서의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인도네시아 에서만큼은 대한민국 사람 최초로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 칭호를 수여 했다. 그는 분명하게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잇는 연결점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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