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에 북경(北京), 주먹 크기의 우박 소동’
‘그치지 않는 호우, 장강(長江) 유역 대홍수로 산샤[三峽]댐 위기설’
‘댐 붕괴하면 언색호(堰塞湖) 현상으로 상류의 충칭[重慶], 청두[成都]가 하류보다 먼저 물에 잠겨’
최근 인터넷에 심상치 않은 중국의 기상 이변과 그 영향이 연일 크게 보도되고 있다. 심지어는 이런 현상이 다 ‘코로나’ 역병을 세계에 퍼뜨린 죄를 물어 중국 공산당을 하늘이 벌 주는 것[天誅]이라고, 천멸중공(天滅中共) 섬네일을 단 유튜브 단신(短信)도 보인다.
과거 산샤댐을 통과하는 3박4일의 중경-의창 크루즈 여행을 한 적도 있고, 이를 주제로 글도 한 두 편 쓴 것이 있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보려고 우리나라 관련 보도를 검색해 보았더니, 이상하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조용하다. 상국(上國?) 중국의 재난(災難)에 대하여는 비단 코로나 뿐 아니라 일체 기사에 엠바고가 걸린 것일까? 그러지 않아도 마음 불편하실 터인데, 우리까지 설왕설래 하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갸륵한 사발통문이라도 돈 것일까?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지만, 장강(長江)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작고한 왕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씨가 오래 전 700리 물길 한강 종영을 마치고 나서 했던 인터뷰 내용을 코칭과 연결하여 공유하고 싶어서 이다.
“잡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얼 하지요?”
인터뷰 하는 기자(記者)가 물었다. 이런 류의 장거리 수영에는 잡념(雜念)이 가장 위험하다는 설명이 있고 나서의 일이다.
늘 깨어 있는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학인(學人)의 선사(禪師)에 대한 질문과도 비슷하다.
“숫자를 셉니다.” 조 선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몇까지?”
“하나, 둘, 그 이상은 세지 않습니다. 그 이상을 세려 들다가는 다시 잡념에 빠져들게 되거든요.”
한, 둘 그렇게 세어서 158,000번 팔을 휘두르는 거리를 조 선수는 열흘에 걸쳐 헤엄쳤다고 한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짧게 답했다.
“물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나를 비웁니다.”
조오련 씨는 인터뷰 말미에 앞으로 중국의 장강(長江) 종영(縱泳)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계획이었다.
코칭을 하다 보면, 고객이 강물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고객의 생각, 감성,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가 끊임없이 물결치며 흐르고 있다. 깊은 웅덩이도 있고, 소용도리도 있으며, 수초가 발목을 휘감는 강변 모래톱도 있다. 고객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코치는 마치 물길을 종영하는 수영 선수와도 같다. 깨어 있지 않으면 그 흐름을 놓치게 되고, 흐름을 놓치면 언제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같다. 코치는 고객에 공감(共感)하지만 동화(同化)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경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객의 존재, 그 잠재력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한 둘 그렇게 스트로크를 세는 것처럼, 코치의 언어는 단순하다. 경청과 질문을 엮어서, 때때로 인정, 칭찬, 격려로 임파워 하면서, 때로는 메시징으로 막힌 물길을 뚫어 함께 흐른다.
조오련 선수가 자신을 비워 강물과 소통하였던 것처럼, 고객의 말하지 않는 간절한 언어를 듣는 코치의 능력 역시 자신을 비움에 있다.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미인 양귀비(楊貴妃)와 그 정인(情人) 안록산의 재미 있는 이야기를 담은 소염시(小艶詩)라는 시를 한번 읽어 보자.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도 그리지 못 하는데 (一段風光畵不成)
깊고 깊은 규방에서 제 마음을 알리려네 (洞房深處說愁情)
자주 소옥(小玉)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頻呼小玉元無事)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只要檀郞認得聲)
양귀비가 홀로 규방에 있어 안록산이 담 밖에 있는 줄을 알고, 어서 월장(越墻)하라는 신호를 보내려고 옆에 앉아 있는 시녀 소옥이를 애꿎게 불러대고 있는 장면을 해학 섞어 읊은 것이다.
이 시(詩)는 법연 선사라는 중국의 화상(和尙)이 어느 거사에게 선(禪)과 화두(話頭)를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처음 인용한 이후 선가(禪家)에서 격외언어(格外言語)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는 시인데, 양귀비가 시녀 소옥을 부르는 것은 (禪에서의 話頭가 그러한 것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방편이지 소옥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리를 담 너머로 듣고 안록산이 얼른 담을 뛰어 넘는 대신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귀비가 저렇게 소옥이를 부를까?’ 라든가
‘아니 소옥에게 무슨 몹쓸 일이 생겼나?’ 라고 자기 나름의 생각을 펼친다면
여러분은 ‘에그 빙충맞은 놈 그래 가지고 연애하겠니?’ 하고 꿀밤을 먹이지 않겠는가?
코칭 역시 그러하다. 코치가 자신을 비움으로써 상대방의 준거틀[Frame of Reference] 속에 들어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맥락적 경청[Contextual Listening]이라고 하며, 이로써 고객과의 완전한 소통을 도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