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 이야기 (9) 차악(次惡)의 리더십 찾기?-그 잣대

허 달 (許 達) 1943 년생 서울 출생, 서울고, 서울공대 화공과, 서울대 경영대학원 졸업 SK 부사장, SK 아카데미 초대 교수, 한국케미칼㈜ 사장 역임 한국코칭협회 인증코치 KPC, 국제코치연맹 인증코치 PCC 기업경영 전문코치, 한국암센터 출강 건강 마스터 코치 저서: 마중물의 힘(2010),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2011),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2012)

미증유의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수그러들 기미 없이 진행 중인데, 그 와중에도 4.15 총선 시계는 째깍째깍 멈춤없이 돌아가고 있다. 친구들과 오가는 단톡방의 분위기는 대체로 정치가랍시는 자들, 그 주위에 설치는 정상배들, 좌, 우 할 것 없이 하나 같이 위선자들이니 꼴도 보기 싫다는 입장이 지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들 중 누가 덜 나쁘냐의 선택을 강요 당하는 형국이 된 나라 꼴이 불행이요, 비감(悲感)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리더십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도대체 정치판을 횡행하는 리더십의 정체는 지금까지 우리가 다루어 온 리더십과는 전혀 격(格)이 다른 것 같은데,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현실 세계의 다양한 리더십의 원천을 한번 살펴 보자.

인기 없는 군대 이야기로 또 한번 돌아 가서, “선착순”, “앉아 번호”, 등의 구호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배웠던 군 복무 필 남성들에게, 최초 그들이 겪었던 훈련소에서 통용되는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나 물어보라. 응당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그 원천이었다고 입을 모을 것이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이것들 동작 봐라?”
9땅거미 어둑어둑 드리울 무렵의 46년 전 아직 스산한 3월 어느 날, 용산 역두(驛頭), 논산 가는 입대 장정들 대열에 쭈그리고 앉았던 필자의 체험을 더듬어 보면, 그 수많은 잡동사니 병력 자원을 인솔하는 몇 안 되는 훈련소 기간사병들이 발휘했던 엄청난 리더십의 원천은 미지(未知)의 폭력에 대한 공포였던 것이 분명하다.

리더십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구성원의 성과도 의당 이와 같은 법칙을 따른다. 피난국민학교 시절에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다녔던 서당에서, 회초리 맞아 가며 뜻도 모르고 외우던 천자문(千字文). 그 별칭인 백수문(白首文)의 유래를 예로 들어보자. 누구나 잘 아는 천자문, ‘하늘 천 따지’ 이렇게 읽고 배웠지만 실은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너르고 거칠다 [여기서 宇는 공간, 宙는 시간이라는 철학적 의미도 있다고 훗날 배웠다]’ 이렇게 운율을 붙여 읽어야 하는 사언고시(四言古詩)라고 한다.

필자 선배 중에 창설 당시의 KIST 화공연구실장 하다가 젊어 돌아간[夭折] 천재 박사 한 분이 있었는데, 연구실 벽에 사진 하나를 붙여 놓았던 것이 기억에 선명하다.

소유즈였는지 아폴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초기 인공위성에서 찍어 보낸 지구의 사진이었는데, 글자 그대로 하늘은 깊이를 모르는 현현(玄玄)한 어둠, 땅은 초록색 섞인 황색[靑綠]의 구(球)로 천지현황(天地玄黃) 이 역력하였다. 그 사진을 보면서 서로 의미 심장하게 웃으며 우리가 나누던 말이 이것이다.

“아마도 천자문의 저자[중국 梁의 周興嗣]는 그의 사유(思惟) 속에서 지구와 우주의 이러한 모습을 보았던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임금이 당시 천재로 명성이 자자하던 주흥사를 잡아들여 가두고는 명(命)했다는 것이다. “오늘 밤 안으로 일천 글자[千字]를 사용하여 사언시(四言詩)를 짓되 단 한 자(字)라도 중복(重複)이 있으면 너는 죽은 목숨이로다.” 불후(不朽)의 명문(名文)인 천자문 250 수(首)는 그런 강압적 환경 하에서 써졌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 하룻밤 사이에 젊은 주흥사의 머리가 호호백발이 되어버렸다 하여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폭력에 뿌리를 둔 리더십이 작용하여 뛰어 난 성과를 이룬 예라 하겠다. 여의도에 출퇴근하던 직장 시절, 늘 주변이 복잡하고 시끄러웠는데 사무실이 국회, 정당 사무실 부근에 위치했던 까닭이 컸다. 요즘의 야바위 정치판에 비하면 당시는 그래도 무언가 건달의 품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모순되고 분주한, 투쟁적인 목소리들이 그칠 날 없었다.

이들을 모으고, 이끄는 리더십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이념, 국가관, 정의, 애국심 등 허울 좋은 겉치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표피(表皮)를 한 꺼풀만 벗기고 보아도, 거기에는 치밀한 이해관계의 그물이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났었다.

이러한 리더십 네트워크 구조가 꼭 정치가, 정상배(政商輩)들의 전유물만도 아니었던 것이 “김밥 말기”[손 비비어 아첨하는 모양을 흉내 낸 말]에 손금이 다 없어져버렸다는 말이 만들어지고 유행하던 곳이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목숨 걸고 보람과 가치를 추구한다던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폭력과 더불어 이해관계를 또 하나의 리더십 원천으로 보게 만드는 분명한 증좌(證左)이다.

이렇듯 일차원적 함수관계를 가지고 폭력이 작용하면 리더십이 생겨난다거나, 이해관계가 사라지면 리더십이 소멸한다거나 하는 즉물적 현상과는 차원을 달리하여, 인간관계의 시너지 창출을 목표로 삼는, 오래 가는 리더십이 또 하나 있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른 바 신뢰와 존중의 리더십이라 부르는 것인데, 그 원천이 되는 키워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신뢰[Trust]와 신뢰성[Trustworthiness]이다. 신뢰의 리더십이란 신뢰성을 스스로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신뢰성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갖추어 지는 것일까? 워크숍에서 자주 ‘신뢰성’을 설명하기 위해 드는 예화(例話)를 하나를 소개하여 설명해 보자.

별로 상상하기에 즐거운 예는 아니지만 참가자 각자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기로 한다. 아주 치명적인 병인데 그냥 놓아두면 죽음에 이르는 그런 병이라는 진단(診斷)이 나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병은 수술(手術)을 받으면 완치(完治)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아주 까다롭고 정교(精巧)한 큰 수술을 성공적으로 시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 두 사람의 의사(醫師)가 있다.

첫 번째 의사는 비유하자면 메스를 든 천사(天使)와 같은 분이다.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 이상(以上)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능력과 심혈을 기울여서 환자의 병을 치료해 준다고 알려진 명의이다. 일흔 나이에 이르기 까지 크고 작은 많은 임상경험을 가졌으니 그런 점에서 또한 안심이 된다. 다만 걱정이 있다면 연세가 높아 과연 정교한 수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또 이를 위한 여러 첨단 장비를 익숙히 다루어 낼 수 있을지 우려를 표명하는 견해도 있다.

또 한 사람의 의사는 젊고 야심 찬 의사이다. 최근에 외국에서 귀국한 사십 대 후반의 의사인데 최신 장비의 사용에도 익숙하고, 이런 류의 정교(精巧)한 수술에 대한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는 최적격 능력 보유자인데,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분이 지금 현재 그가 일하던 나라에서 의사사고(醫事事故)와 관련된 재판에 계류 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형사소추(訴追)를 피해 귀국했다는 소문이 있으며, 그 사고의 내용이 꺼림직 하다는 것이다.

내용인 즉 이 의사가 수술을 맡았던 환자의 멀쩡한 다른 장기를 잘라내어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환자에게 불법적으로 이식(移植)을 해주고 돈을 챙겼다는 혐의인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코웃음 치고 주위에 수소문해 보니, 이 의사는 돈이 생기는 일이라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탐욕스럽고 비인간적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자! 이제 워크숍 참가자가 선택할 차례이다. 각자의 생사(生死)가 달려 있는 중요한 문제이니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라면 어느 의사에게 자신의 수술을 맡기겠는가?

지난번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이십 명쯤 되는 수강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더니 첫 번째 의사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이 겨우 네댓 명, 두 번째 의사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이 칠팔 명쯤 되었다. 그래서 손을 들지 않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나머지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느냐고…… 모두 한바탕 웃었는데, 그러더니 교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겠냐는 역공(逆攻)이 들어왔다. 시침 뻑 따고 대답했다. “다른 의사를 찾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또 웃음. 그런데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하나 밖에 없는 내 목숨 아닌가? 신뢰할 수 없는 의사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 위의 의사 두분 다 찜찜한 데가 있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망설이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품(性稟-Character)’과 ‘역량(力量-Competence)’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갖추고 있어서는 신뢰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위의 예에서 보았다. 좋은 성품이란 성실성(Integrity), 성숙성(Maturity), 그리고 승-승을 추구할 수 있는 심리적 풍요로움(Abundance Mentality) 같은 성품 등을 말하며, 역량이란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기술(Knowledge/Technology), 개념화 능력(Conception), 그리고 창의력(Creativity) 등을 말한다. 리더십 교과서에서는 “좋은 성품”과 “탁월한 역량”을 동시에 갖출 때 신뢰성이 형성된다고 하여, 필자도 두 가지 측면에서 심각하게 스스로의 신뢰성 수준을 돌아본 일이 있었다.

현실의 장(場)에서는 위와 같이 각기 폭력, 이해관계, 신뢰 등 원천이 다른 리더십의 여러 형태가 상황에 따라 어지러이 섞여 작용하여, 리더와 구성원[Follower]의 자기기만[Self-deception]과 엉키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좋은 코치의 역할은 엉킨 실타래를 잘 풀어 고객과 조직이 스스로 신뢰성을 갖추고 향상토록 도와 주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권이 바른 이념과 가치관, 높은 국정 운영 전문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신뢰 기반 리더십을 추구하기는 커녕, 패 가르기 폭력과 내로남불, 이해타산과 몰염치로 이합집산을 되풀이 하는 파행(跛行)이 안쓰러워, 공연한 코치의 푸념 한마디를 적어보았다.

그나마 어느 정당, 어느 후보가 다소라도 바른 성품과 국정운영 역량을 갖추었는지를 잣대로 삼아, 차악(次惡)을 선택해 볼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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