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 특집 인도네시아고려독립청년당 이상문 애국지사(95세)
1944년 12월 29일 새벽 중부 자와 스마랑 스모워노 훈련소에 모인 9명의 한인들은 고려독립청년당 강령 선언문에 왼손 새끼 손가락을 베어 피로 서명했다. 인도네시아 고려독립청년당이 조직되면서 9명은 혈맹동원이 되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자바 수용소 조선인 포로감시원 이억관, 김현재, 문학선, 이상문, 손양섭, 조규홍 등의 동지들로 조직되어, 날마다 모여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2014년 8.15 광복절 69주년을 맞이하여 한인포스트는 독립운동 애국지사가운데 생존해 계신 이상문 애국지사 특집기사를 게재한다. 한인포스트는 지난해 2013년 광복절을 맞이해 전남 광주보훈요양원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애국지사 이상문 옹(95세.전남광주)께서는 “70년전 ‘아시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고 외치며 일본과 싸우던 동지들은 다 떠났다”며, “광복절을 맞아 인도네시아 한인동포들이 찾아와 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2011년 11월 17일 제72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이상문 애국지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인정하여 건국포상을 서훈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광복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남쪽나라 인도네시아에서 한인들의 투쟁의 결과였다.
‘고려독립청년당’ 스마랑 지부장 이상문 청년. 나라를 구하겠다고 조국을 떠나 인도네시아에 도착한지 71년만에 인도네시아 한인포스트는, 95세로 연로한 이상문 애국지사의 인도네시아에서 항일운동과 근황을 전한다.
인도네시아에 스마랑에 도착한 이상문 청년은 필리핀 등지에서 생포된 연합군 포로를 지키는 경비원으로 배치되었다. 이상문 청년뿐만 아니라 1400명 군속원으로 징집된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기만 학수고대했다. 2년 계약에 월급 50엔을 주겠다며 유인했지만, 사실상 강제동원이었다. 인도네시아 자바로 내몰린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1408명.
고려독립청년당을 만들어 혈서로 맹세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포로 수용소를 탈영하는 한인 군속원들이 속출했다. 이를 보다 못해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지키는 한인 군속원 가운데 이억관을 중심으로 “패망을 앞둔 일본을 그냥 보낼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자”며 ‘고려독립청년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드디어 1944년 12월 29일 새벽 스마랑 시 스모워노 훈련소에 모인 9명의 한인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을 만들고 당 선언문과 강령을 낭독하고, 직접 만든 당가도 불렀다. 총령에는 이억관이 추대됐다. 강령 선언문에 왼손 새끼 손가락을 베어 피로 서명했다.
“1. 아세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라. 2. 만방에 우리의 지의를 소통하고 유대할 수 있는 최단의 길을 가라. 3. 민족을 위함이요, 조국에 이로운 행동이면 결코 주저하지 마라”고 죽음을 각오한 동지들은 혈서로 남겼다.
취재진이 방문한 자리에서 애국지사 이상문 옹께서는 20대 청년처럼 고려독립청년당 당강령을 큰소리로 외치면서 당가를 불렸다.
‘고려독립청년당’은 반둥 본부에 이억관 총령을 중심으로, 자카르타 지구에 문학선, 스마랑 지구에 이상문, 암바라와 지구에 손양섭, 조홍규 등 총 9명이 동지들이 매일 같이 접촉하며 거사를 꾀했다.
암바라와 의거 발생…민영학 자결
한편 암바라와 지역에서도 항일운동이 조직되었다. 암바라와 의거당이 결성한 일주일 뒤, 암바라와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 등 세명의 당원은 의거를 일으켰다. 이들은 싱가포르 전출명령을 받고 이동 중, 트럭을 탈취하고 수용소로 돌아가 탄약과 총을 빼앗은 뒤, 암바라와 마을 일대를 돌며 일본인 12명을 사살했다. 이에 급파된 일본군에 쫓기다 3명은 모두 암바라와 옥수수 밭에서 자결했다.
이상문 애국지사는 “1945년 9월 4일 나혼자 암바라와로 가서 3 의사 유골을 수습했어요. 당시 먼저 귀국하는 동명통신 남명우 기자 편에 3분의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했어요”라고 말했다.
재자바조선인민회 창립…태극기 게양하며 울먹여
1945년 8월 해방을 맞고 인도네시아에 흩어진 초기 한인들은 재자바조선인민회를 창립했다. 한인들은 재자바조선인민회를 조직하고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서 건물에 게양했다. 자카르타는 꼬타지역과 북부 스넨역 부근, 반둥, 스마랑 중심으로, 주로 군속원들이 많이 배치된 지역에 지부를 두었다.
이상문 애국지사는 당시 재자바조선인민회 스마랑 지부(회장 이용성)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스마랑 지부는 이상문 애국지사가 2대 재자바조선인민회 스마랑 지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상문 애국지사는 “당시 한인회는 돌아가신 독립운동 열사들의 위령제를 모시고, 연합군 통치아래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중요했다”고 전했다.
또한 “1946년 1월 1일 스마랑 지부에서 60여명의 한인들이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모두 울었습니다”라며, “이 태극기는 나와 지부원들이 밤새 만들어서 다음날 내가 직접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사진을 한인포스트 취재진에게 보여 주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인도네시아는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군은 특히 네덜란드군이 중심으로 다시 인도네시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강제징집된 한인들을 전범과 같이 취급하라는 군령에 따라 한인 군속원들에 대한 전범자 색출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연합군 포로의 말 한마디 증언에 따라 한인들이 전범자로 판결받아 사형 145명, 유기 징역형 52명 당했다고 이상문 지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서부자와 가룻에서는 양칠성 의사가 독립군과 같이 네덜란드 군과 싸워다 잡혀 총살되어 가룻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고 이상문 지사는 기억했다.
4년만에 그리던 조국에…동지들 명예회복에 나서
대부분 일본 군인들은 경제력을 갖고 있어 현지인 변호사를 기용하여 전범에서 빠져나갔고, 돈없는 한인들은 전범처리되는 기현상이 발생해 희생을 당했다고 전했다.
1년여 동안 전범자 감옥에서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 조국을 떠난지 4년만에 1947년 3월 말, 조국으로 살아 돌아온 이상문 지사는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났다. 이후 전남에서 휘발유 배급 분배사로 근무하면서, 계장, 과장을 거쳐 75년에 곡성군수, 76년에 구례군수를 역임했다.
이상문 애국지사는 국가보훈처를 30년이상 문을 두드렸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동지들을 생각하니 그냥 있을 수 없었다”며, “일본군들이 패전하고 퇴각하면서 기록을 없애버렸지만 최근 네덜란드에서 자료가 발견되어 독립운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전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1년 11월 17일 제72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이상문 애국지사에게 건국포장을 서훈했다. 이에 애국지사 이상문 옹은 “이제 인도네시아에서 전사한 동지들에게 명예를 회복시켜주어 여한이 없다”고 밝혔다.
2014년 올해는 이상문 청년이 일본군에 징집되어 나라를 구하겠다고 조국을 떠나 인도네시아에 도착한지 71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23세의 청년은 이제 95세의 연로한 노인이 되어 있다.
지난해 취재진이 방문한 자리에서 이상문 애국지사는 “전남 광주 보훈 요양원은 가족과 같이 돌보고 있어 너무 편하고 감사하다”며, 당시 23세 청년의 목소리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노라, 인도네시아가 그립다”며, “하시는 일 모두 성공하시길 빕니다”라고 한인동포에게 친서를 남겨 주었다. <한인포스트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