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월 회장 “밖으로 나가라, 나가면 국내엔 없는 게 있다”

<사진설명> 한국남방개발의 남부깔리만딴주 낀땁(Kintap) 산림개발 현장(1978년). 최계월 회장 오른쪽이 당시 자금관리역이던 신동혁 한일은행 차장(후일 한미은행장, 은행연합회장 역임)

한국남방개발주식회사, 대한민국 ‘해외직접투자 제1호’

고 최계월 회장의 발인이 거행된 지난 11월 29일은 고인이 창업한 한국남방개발주식회사의 설립일과 우연히 일치한다.

고인은 해외투자의 길을 트고, 1, 2차에 걸쳐 밀어닥친 오일쇼크로 인해 모국의 경제기반이 흔들리던 1970년대 말, 불가능일 것이라 여겨졌던 인도네시아산 원유도입을 성사시켰고, 장기적인 원유공급 대책을 추진하라는 박대통령의 강권에 못 이겨 1981년 코데코에너지주식회사(Kodeco Energy Co., Ltd.)를 설립하여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유전개발사업에 착수한 개척자요, 풍운아였다.

88올림픽 유치위원에도 이름을 올려 역할을 나눴고, 세계교민연합회 회장의 짐을 짊어지고 세계를 누비는 한편, 국내의 젊은이들에게는 “밖으로 나가라, 나가면 국내엔 없는 게 있다”며 세계를 무대로 삼을 것을 독려하였다.

아울러 이곳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 기업들에게도 여러 차례 결정적인 구원의 손길도 내어 주었다. 고인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 국내에 17개의 현지법인을 거느리며 한인 후발기업의 진출에 견인차 역할을 하여, 양국경제협력 증진의 공적을 인정받아 1996년 7월에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일등공로훈장(Bintang Jasa Pratama)’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아울러 1972년 한인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14년간 한인사회의 골격을 세웠다.

산림개발, 석유개발, 수산업이라는 회사정관상의 업종이 말해주듯, 선경지명적인 혜안이 엿보이는 50년 전의 그날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184cm 무술에 능한 수재
와세다 대학생
음력으로 1919년 1월 5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생한 최계월(崔桂月)은 합천소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이주하자, 히로시마 소재 광릉중학교와 와세다 제1고등학원(부속 고등학교)을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법문학부 예과에 입학한다.

그는 184cm에 달하는 건장한 체구에 유도 4단, 검도 4단의 무술을 보유하여 채석장에서 돌을 날라도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짊어졌고, 도쿄 뒷골목에서 린치당하는 한국유학생들을 수시로 구원해 줄 정도였다.

도쿄 유학시절 최계월의 도움을 받고 그 후 평생 친구가 된 사람 중엔 ‘빨간 마후라’ 극작가인 고 한운사 선생이 있다.

영국 사학의 명문 옥스포드-케임브릿지 처럼, 도쿄 스미다가와(隅田川) 강에서 연례행사로 열리는 와세다-게이오 대학 조정경기 정기전 선수로 출전할 정도로 스포츠에 만능이었다.

냉전시대 서부 이리안 협상
코디네이터
예과 3학년 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입대 20일 전에 서둘러 도요코(豊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광릉중학교 선배이며 하버드대학을 나온 명치대학 마쓰모토 교수가 그의 조카딸을 중매한 것이었다.

최계월은 일본 동북부 센다이(仙臺)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2사단에서 소정의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하여, 오사카 육군사령부 레이더 기지에서 전쟁기간 내내 복무하게 된다.

종전이 되자 그는 피 식민지 국민에 대한 민족차별이 거의 없이 오직 주먹과 머리 실력만으로 서열이 정해진다는 야쿠자 세계와 인연을 맺게 되어, 당시 야쿠자 종중(宗中)의 총보스인 다카모토 데루미치(高本照道)의 바로 아랫자리인 4명의 대부(맞수) 중 한 명에 등극한다(월간조선 1994년 4월호/통 큰 한국인의 파란만장한 삶-엄지도 기자).

1963년 종신대통령제까지 관철시킨 수까르노는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미국으로 양분되는 동서 냉전시대의 경쟁관계를 등거리외교로 이용하여 ‘서부 이리안 해방운동(Operasi Mandala)’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1949년 말 미국, 호주, 벨기에의 중재로 독립전쟁이 종식되며, 헤이그에서 타결된 다자협상(Konferensi Meja Bundar)’ 협정서에는 “서부 이리안(Irian Barat) 문제는 향후 추가협상을 통해 주권을 이양한다”는 식으로 유보적인 단서를 남겼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이를 차일피일 미루자, ‘신식민지주의(新植民地主義) 기도’라고 규탄하는 수까르노는 기필코 이를 분쇄할 것이라고 선동하고 있었다.

이슬람계를 포함한 국내 여론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자, 1957년 인도네시아공산당(PKI) 및 좌익노조와 같은 극단주의 성향의 단체들이 앞장서 인도네시아 통치 지역 내에서 네덜란드인에 대한 추방령을 내리고, 자산몰수라는 물리력까지 행사한다.

이에 맞서 네덜란드 정부는 서부 이리안 지역을 48,000명이나 되는 자국민의 피난지로 삼고 ‘파푸아 정부’를 세우겠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에 격분한 수까르노는 독립 15주년이 되는 1960년 네덜란드와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른다. 양국간의 외교채널이 막히자, 무력행동만이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초긴장 상태로 빠져든다.

수까르노 정부는 경제개발에 역점을 두며, 군사적인 지원에는 인색하던 미국에 대해 보라는 듯이, 소련에 접근하여 후르시초프를 비롯하여 동구권 국가들의 군사지원을 얻어 내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에 서부 이리안 민족대표들은 그들의 장래 문제에 대해 선택의 갈등을 겪게 된다.

1958년 1월 일본과 인도네시아간에 ‘대일청구권 협상’’이 타결되었다. 무상 3억불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이 유입되기 시작하자, 일본 시행사들이 몰려오며 인도네시아 경제지도를 새로 그리기 시작한다.

이때 기시 수상과 유착된 ‘기노시타 산쇼(木下産商)’라는 기업이 인도네시아 프로젝트 시행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 회사 부장인 야마나가 마사히로(山中正浩)를 스카우트하여 도쿄에서 ‘흥아무역주식회사(興亞貿易株式會社)’라는 기업체를 설립한 한 재일교포가 있었다. 바로 최계월이었다.

인도네시아 사업에 경험이 있고,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야마나가를 자신이 세운 회사의 사장으로 앉히고, 자신은 전무이사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앉게 된다.

1950년대 말 후덥지근한 여름날, 최계월은 후나다 나카(船田 中) 중의원의장으로부터 당장 당사로 들어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공관엔 이상한 옷을 입은 흑인 세 사람이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부족장 완마(Wanma)와 서부 이리안에서 온 민족대표라고 했다.

그들은 민족의 장래를 두고 세 가지의 방향을 놓고 고민하던 차였다.
첫째,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에 편입하는 방안, 둘째 인도네시아에 통합되어 들어가는 방안, 셋째 자주 독립하는 방안이었다.

그들이 일본에 들어온 목적은 극우주의자요, 대륙낭인으로 아시아 지역에 잘 알려진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명성을 연상하며 일본 정치단체로부터 자금도 얻고 자문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도야마는 이미 15년 전에 고인이 되었고, 그렇다고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처지라 격무에 시달리던 후나다 의장은 이들을 보살필 행동대원으로 최계월을 부른 것이었다.

최계월의 보호를 받으며 동고동락하던 서부 이리안인들은 마침 대일청구권 협상단원으로 일본을 자주 드나들던 밤방(Bambang)을 최계월로부터 소개받아 그들의 장래문제에 관해 많은 조언을 듣게 된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이들은 최계월을 찾아와 단도직입적으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미스터 초이(Choi) 말대로 우리는 동양인입니다. 밤방의 이야기도 잘 들었고, 일단 수까르노 대통령을 직접 만나 최종적인 얘기를 들어보고 우리의 태도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돌아갈 수 있는 편의만 마지막으로 주선해 주십시오. 미스터 초이, 우리는 당신이 베풀어준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부족장 완마는 이렇게 울먹였다.

다음날 후나다 의장은 최계월을 붙들고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때 최계월과 밤방의 권유로 인도네시아로 돌아간 서부 이리안 민족대표들은 자카르타에 도착하여 수까르노를 만난 직후, 내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하였다.

”서부 이리안의 모든 부족들은 인도네시아와 통합한다!” 1962년 1월, 요미우리 신문이 논평한대로 “서부 이리안의 민족대표들은 반다해(Banda Sea)에 빠져 숨이 차 허덕이는 수까르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구세주였다”

1962년 수까르노 초청으로 인도네시아 첫 방문…산림개발사업권 따내
1962년 8월 8일 최계월은 일본주재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부터 수까르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인도네시아 첫 방문길에 오른다.

인도네시아란 무대에 한국인 사업가가 첫 발을 내딛는 역사적 순간이다. 내각비서처장 모하맛 익산(Mohammad Ichsan)씨가 공항까지 마중 나와 친절히 에스코트한다. 대통령 궁에 도착하여 접견실로 들어서자 마자 대통령이 와락 껴안는다.

 “각하,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좋은 친구였습니다. 이젠 내가 친구를 도와줄 차례요. 사업을 하신다는데 무슨 사업을 원하시오.” 대통령의 다정한 눈빛은 무엇이든지 도와주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산림개발사업을 추진코자 합니다.” “산림개발? 그거 매우 힘든 사업인데….. 보기엔 쉬운 것 같아도.”

다이아몬드 광산 등 좀더 손쉬운 분야를 대통령이 추천하기도 하였지만 그날 대통령은 최계월에게 ‘깔리만딴 지역 일정면적의 산림개발권을 10년 동안 무상으로 제공한다’ 는 각서를 써 주었다.

그리고는 말미에, “미스터 초이, 내가 계속 대통령 할 터이니 한꺼번에 서두르지 마십시오. 당신 요구대로 우선 산림개발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시지요” 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수까르노는 그 다음해인 1963년 7월 종신대통령이 된다.

다음 날 숙소로 찾아온 수자르워(Soedjarwo) 산림청장과 인사를 나눈 후, 최계월은 일단 일본으로 돌아갔다.
1988년까지 24년간 산림부의 수장(청장, 장관)을 지낸 수자르워 장관은 2004년 별세할 때까지 최계월의 절친한 지기가 되어 그의 자제가 코데코사의 주주로 등재되기도 한다.

JP와 수카르노 첫만남
주선…16년만에 모국방문
1962년 11월 초 최계월은 어색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잠깐 잊고 지냈던 완마의 목소리였다.

지금 수까르노 대통령을 수행하여 도꾜에 체류 중이라는 안부전화였다. 순간 최계월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마침 일본을 방문 중인 한국의 2인자를 수까르노에게 소개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인 JP가 미국을 방문하고 귀임 길에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수상을 만나기 위해 도쿄에 머물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던 터였다.

최계월은 주일 대사관 최영택 참사관에게 전갈을 넣었다. 대답은 ‘승락’으로 돌아왔다.

제국호텔에서 가진 JP와 수까르노의 면담은 예정된 시간을 넘어 양국간의 협력방안과 경제교류에 관한 문제로까지 깊어지고 있었다.

회담 말미에 JP가 수까르노에게 물었다. ”여기 한국인 미스터 초이가 인도네시아 사업에 관심이 있다는데 도와 주시는겁니까?” 수까르노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그렇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는 우리를 도와 준 좋은 친구입니다.”

JP는 수까르노를 만나고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육사 8기 동기생인 최영택에게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자네 그 사람 이름이 최 뭐라고 했지? 그 양반 물건은 물건인가 봐. 그 양반, 인도네시아에 들어가 사업을 하려면 일단 한국에 들어오라고 해.”

JP의 이 말 한마디가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사업을 추진하려던 최계월이 한국에 기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3월 보통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동양인 중년 신사와 아프리카 토착민 외모와 비슷한 이방인 한 사람이 김포공항 트랩을 내리고 있었다.

이들은 다름아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해, 장경순 농림부 장관 명의의 초청장을 받아 입국하던 최계월이라는 재일교포와 서부 이리안의 부족장 완마였다.
최계월에게는 16년만의 모국 방문이었다.

최계월은 최고회의의장 비서인 손영길 대위의 안내를 받아 박종규 경호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면담하게 된다.

”최사장, 와세다를 다니시다 학병에 가서 소위로 제대하셨다지요?  어디에 계셨소? 전쟁 때는…“ 일본육사를 나온 박정희는 사전에 신상을 다 파악해 놓고 있었다.
“예, 오사카 육군사령부 레이다 감식반에 있었습니다.” 완마를 데리고 갔듯이 최계월의 방문목적은 뻔한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을 비롯한 자원개발에 관한 주제를 꺼냈고, 박 의장은 그런 사업은 해볼만한 사업이라 수긍하시며, 가능하면 민정이양 이전에 서두르라고 배석자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우선 산림개발에만 소요되는 자금이 2천만 달러라는 최계월의 말을 듣고는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혁명정부의 총 외환보유고는 4천8백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고 지불보증, 부채계정 등을 빼고 나면 실제로 가용한 자금은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니, 모두가 당황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면담이 끝날 때쯤 박의장이 최계월을 향해 카랑카랑한 소리로 말했다.

“최 사장, 그 사업은 꼭 하시요. 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원해 드릴 테니, 태극기를 들고 꼭 그곳에 가시요. 자립경제를 위해 자원확보가 시급하다는 내 말 꼭 기억하시고요….”
혁명직후의 최고회의 의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야말로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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