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조유에게 나무를 깎는 것은 나무가 지닌 고유의 형태적
특성을 존중하여 나무를 나무 자체로 부활시키는 일이다.
글 장상길 기자 l 사진 Tjandra Kirana, Mukti
‘에로시’를 다듬는 시간
2015년 9월 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소사이어티 코리안섹션의 초청으로 열리는 박조유 작가의 <우드워킹 조각 초청전>이다.
인도네시아 헤리티지 소사이어티는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증진하기 위해 800여 명의 외국인들이 모여 있는 단체로 코리안섹션은 이수진 회장을 중심으로 박물관 연구, 스쿨 프로그램, 사진, 문화 탐방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박조유 작가와 코리안섹션의 인연은 지난 2013년 이 단체의 초청으로 세계 50여 개국의 헤리티지 회원들에게 인도네시아 파푸아 아스맛 부족의 문화와 삶, 그리고 조각예술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박조유 작가는 1990년대 초부터 인도네시아 서파푸아 아스맛 부족의 목조예술에 빠져 지난 20여 년간 현지를 수차례 답사하며 연구를 이어왔다.
박조유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은 목조각의 세계에 빠지면서 일관되게 선보였던 추상조각이다. 박조유 작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동부의 보조네고로 산간마을에서 구한 자바 티크 고사목으로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에로시(erosi=erosion)’로 통용되는 고사목은 땅속에 묻혀있는 밑동이거나 산불로 타다 남은 부분, 뿌리덩어리가 대부분이지만 오랜 세월 강바닥의 뻘이나 땅속에 있으면서 단단해져서 돌덩이처럼 무겁고 짙은 암갈색으로 변한다.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목재는 건조과정에서 뒤틀리고 깨지고 갈라지는데 이는 세포로 구성되는 유수공이라는 물주머니들 속에 있는 수분 때문이다.
이 수분은 끈적끈적한 젤리 같은 액상 상태의 셀룰로오드, 리그닌, 탄닌 등이 섞인 복합물질로, 자연 상태에서 막 밖으로 나오는 데만 수십 년에서 백여 년 이상 걸린다.
박조유 작가는 크기와 모양이 매우 불규칙하고 속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이 나무에 큰 매력을 느꼈다. 보조네고로 산간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에로시를 발견하면 직감적으로 작품의 형태가 떠올랐다. 박조유 작가는 그런 순간을 ‘인연’으로 표현한다. 이 만남에서 촉발되는 직관의 초기형상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수백 년이 넘는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경이로움 앞에서 박조유 작가는 나무의 순수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박조유 작가에게 인도네시아에서의 작업은 오랜 세월 형성된 재료와의 만남이었으며 나무를 더욱 나무답게 아름답게 부활시키는 시간이었다. 나무를 깎고 다듬다보면 그는 어느덧 삼매에 이르렀다. 썩고 흠집이 난 부분을 매만지면 어느덧 여인의 살결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촉과 온기가 나무에게서 느껴졌다.
나무의 본질에 대한 탐구
“낭인처럼 제주에 흘러들어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예술가의 입지를 스스로 키웠던” 박조유 작가는 나무를 재료로 추상조각의 일가를 세워왔다. 박조유 작가의 예술적 사유가 출발하는 지점은 나무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다. 나무는 그 자체로 오랜 시간 자연이 빚어내고 숙성시킨 최상의 조형언어라는 게 박조유 작가의 생각이다. 때문에 그는 나무가 가진 본질적 형태를 해치는 것을 경계한다. 나무가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걸림돌이 될만한 유기적 형상의 이미지도 버린다.
박조유 작가의 조형언어가 현대조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브랑쿠시의 추상조각 개념을 수용한 것도 나무의 본질적 아름다움 그 자체를 조각의 지향점으로 삼고 탐구하기 때문이다. 추상조각은 재료 그 자체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때문에 재료의 물성이나 특징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박조유 작가는 사람이나 동물, 꽃 같은 유기적 형상을 단순화시켜 추상 이미지를 구현하는 서구 추상조각 개념을 받아들이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박조유 작가의 작품세계는 단순화된 유기적 추상마저도 탈각시킨 극도의 미니멀적 사유이다. 이는 재료의 순수함을 가리는 최소한의 이미지마저도 거부하는 작가의 탈이미지 조형의 정신이다.
명지대학교 디자인학부 이대일 교수는 박조유 작가의 조각세계를 “나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독특한 형태로부터 저절로 추출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즉 “나무가 지닌 성질에 따른 목리나 그 형태적 특성을 존중하여 나무를 나무 자체로 부활시켜내고자 하는 자세”가 박조유의 예술세계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박조유 작가에게 나무를 만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촉각을 통하여 본질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다.
재료를 다듬어 예술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손의 일이다. 예술가의 생각은 재료를 다듬는 손을 거쳐야 비로소 구현된다. 예술가의 생각이 손으로 전달되면 비로소 재료에 예술적 생명력이 담기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손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오래 겪으면 어느 순간 머리와 손이 동시에 생각한다.
논리가 아니가 직관이다. 예술가의 손에 각인된 본질적 직관과 경험적 직관이 뒤섞이며 일상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조각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무의 형태가 갖는 특성이 바로 박조유 조형언어의 출발이자 박조유 작가의 예술적 사유의 출발인 셈이다.
나무를 대하는 박조유의 마음
1942년 전남 무안에서 출생한 박조유 작가는 군대 제대 후 부산에서 동물조각을 접하면서 목조각에 입문했다. 피나무로 일본 수출용 동물, 불상, 인형을 깎으면서 조각과 공예를 독학했다. 공예의 숙련도가 깊어질수록 미술에 대한 갈증도 깊어져 일본어 원서로 추상미술을 독학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정립해 나갔다.
박조유 작가가 나무를 대하는 자세는 곧 나무에 표현되는 형태언어의 근본 뼈대가 된다.
박조유의 조각세계는 주로 나무에서 표현되는데 그는 나무와의 만남을 ‘숙명’이라고 표현한다. 박조유 작가에게 있어 나무는 “인간의 벗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의 작업이 “나무를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조유 작가가 인도네시아 서파푸아 지역의 아스맛 부족의 삶과 문화 그리고 목조각에 흠뻑 빠져든 것도 나무를 조상으로 생각하며 나무속에서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아스맛 부족의 원시성에서 나무가 가진 본질적인 위대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인연의 끈이 20년 세월을 훌쩍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도 나무라는 매개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박조유 작가는 지금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숨쉬고 움직이는 나무를 어떻게 나무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그런 고민을 통해 나무가 보낸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고, 영구한 나무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목공예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그의 소망처럼 박조유 작가는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를 작품에 담는다. 그 곡진한 마음이 나무에 풀어질 수만 있다면 그가 매만질 나무는 이 세상의 모든 나무다.
그가 인도네시아의 ‘에로시’나 아스맛 부족의 목조각과 인연이 닿은 것도 어쩌면 그런 마음의 길을 따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걸었기 때문이 아닐까. 박조유 작가는 2012년 전시회 도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무가 있는 곳이 극락이고 천국이다. 뉴기니섬 서남부 밀림에 사는 아스맛족은 나무가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것 같다. 나무는 어머니다.”
나무를 가까이 하면 아늑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의 말처럼 어쩌면 나무가 인류의 시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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