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이래 최초의 해외유전개발’
이란의 팔레비 왕정이 붕괴되자 산유국간 카르텔은 무너지며 일산 5백만 배럴의 이란 석유수출이 금수되면서 제2차 오일쇼크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경제장관회의를 열어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뾰족한 묘수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긴장감마저 감도는 청와대 경내, 이희일 경제제1수석 산하 오일부문 담당인 김찬진 경제비서관은 대통령의 호출을 자주 받는다.
배럴당 14불 하던 오일가격이 40불대까지 치솟자 전 내각이 총력을 기울여 원유확보를 위해 팔 걷고 나섰다.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장예준(張禮準) 동자부장관, 이문용(李汶容) 외무부차관 일행의 정부 고위사절단이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을 순방하는 도중에 인도네시아에 들러 예포까지 쏘는 환영을 받았다.
당시 한국정부는 일일 3만 배럴 정도의 원유가 절대 부족하여 값의 고하에 관계없이 원유확보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뻐르따미나 총재 하르요노(Haryono), 에너지광업부장관 수브로또(Soebroto)가 배석한 가운데 수하르또 대통령을 예방하여 원유공급을 간청하였으나 정중히 거절 당하고 만다.
인도네시아는 당시 일산 1백 2십만 배럴을 생산하는 OPEC 회원국이지만 중요한 자원산업이나 기간산업은 대부분 일본, 미국, 구라파 국가 기업에 의해 선점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 각료회의에 들어가는 국무위원은 무려 40명이 넘지만, 그 중 우리를 대변해줄 친한파 인사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무슨 수로 그들이 꽉 쥐고 있는 원유를 한국에 들여온단 말인가? 한국 총리 일행이 빈손으로 인도네시아를 떠난 지 2주가 지난 시점, 정재석(丁哉錫) 경제기획원차관이 최계월 사장을 불러 에너지 수급의 긴박성을 설명하면서 ‘당신만이 인도네시아로부터 원유를 공급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인도네시아 출장을 강력히 지시하였다.
그러나 최사장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국무총리 사절단이 거절 당한 마당에 민간인인 자신이 재시도할 경우, 양국의 체면이 손상될 것은 물론이고, 더구나 개인회사 사장 신분으로 그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실현시킬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사장이 아직 국내에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정재석차관은 최사장을 다시 불러 역정을 내며, 이번에는 신현확(申鉉碻) 경제부총리의 엄명이라 하시면서 당장 인도네시아로 출국할 것을 재차 촉구하였다.
이 정도 상황에 이르자 최계월은 별 도리 없이 다음날 자카르타 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베니 무르다니 장군을 찾아, 한국 정부의 딱한 상황을 설명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결국 베니 장군의 결단에 힘입어 일본으로 기배정된 물량에서 일일 15,000배럴의 원유를 한국으로 돌리는데 성공한다.
이 원유는 공시가격과 시장가격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많은 이윤추구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계월은 공시가격으로 전량 경인에너지 사에 공급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정부는 내친김에 추가 물량을 인도네시아 정부에 간청하게 되자, 난감해진 대통령의 측근들인 수조노 후마르다니(Soedjono Hoemardani) 장군, 베니 무르다니(Benny Moerdani) 장군, 그리고 그들의 경제담당 보좌관인 소피안 와난디(Sofjan Wanandi)는 “추가 물량으로 원유는 어렵고, 대신 액화천연가스(LNG)로 대체함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이를 근거로 당시 박봉환(朴鳳煥) 동자부 장관은 우여곡절 끝에 뻐르따미나 사와 연간 200만 톤의 LNG 도입계약을 체결한다. 이것은 한국 LNG도입의 효시가 되었고, 이를 위해 1983년 8월 한국가스공사가 설립되었다.
1979년 1월 초, 최계월은 근자에 들어와 벌써 세 번째 청와대 호출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옆에 앉은 최계월의 손을 꼭 잡고 담배를 권하며 원유도입 성공을 치하하였다.
그로부터 불과 2개월이 지난 화창한 봄날, 박 대통령은 대농 박용학 회장, 코롱 이원천 회장, 한국남방개발 최계월 사장 등 몇몇 기업 총수들을 관악컨트리클럽으로 불렀다.
아홉 홀짜리 코스의 8번 홀이 끝나자, 박대통령이 불쑥 말씀을 꺼냈다. ”도중에 미안하지만, 난 오늘 최 사장하고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우리 좀 쉬었다가 다시 하기로 합시다.” 하고는 클럽하우스를 향해 앞장섰다.
VVIP실에 들자마자 수행원들이 경호차량 아이스박스에 보관시켜 놓았던 막걸리를 가져오자, 박종규 경호실장을 제외한 막걸리 잔이 두 순배 정도 돌았다.
대통령은 옆에 앉은 최계월에게 시선을 보내며, “최사장, 석유개발 합시다.” 라며 단호하게, 그러나 하소연이 섞인 어투로 말씀을 이어갔다. “영일만 유전개발이다 뭐다 해서 공연히 내가 망신만 당했잖아.
최사장, 내가 진두지휘를 해서라도 적극 밀어줄 터이니 이제부터 꼭 나서 주시오.” 정부는 이미 1978년 1월 동력자원부를 발족시키고, ‘해외자원개발촉진법’을 제정하였으며, 1979년 3월에는 한국석유개발공사를 설립하였다.
박대통령과 최계월의 골프장 회동에 대한 후속조치로 김찬진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주축으로 유전개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려 나온 어지러운 총성은 국가의 운명은 물론, 한국남방개발주식회사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만다.
실은 이번 대사건을 맞아 최계월은 유전개발사업에서 손을 뗄 작정이었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데다가 모든 기술을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까닭에, 이것만은 우리 능력으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1963년 재일동포로서 일본에서 건너와 첫 대면을 한 이후 17년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큰 어른을 잃어버린 지금, 누굴 믿고 그러한 국가적인 과업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권탄생의 기반이 취약하였던 제5공화국은 이 ‘마두라 유전개발사업’을 정권의 간판사업으로 지정하여 놓고 밀어 붙이고 있었다.
특히 인도네시아 원유도입의 산파역을 맡았던 김찬진 변호사가 국무총리실로 전보된 이후에도 애국심에 호소하는 그의 설득은 멈출 줄 몰랐다.
국가원수의 유고로 혼란에 빠진 정부의 원유수급정책은 다시 암담한 상황에 처했고, 정치권마저 예측불허의 혼돈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럴 즈음 베니 무르다니 장군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한국정세를 직접 파악할 목적으로, 1979년 12월 30일 영하(零下)의 추위를 무릎 쓰고 은밀하게 서울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 정부의 원유비 축량은 10여일 분에 지나지 않아 국민들은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였으며, 대부분의 산업체도 영향을 받아 전전긍긍하였다. 특히 국방안보상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때 육본 정보참모부장이던 최성택 소장이 인도네시아 국군 정보참모부장인 베니 소장을 김포공항에서 파트너로서 영접하였다. 최성택 장군은 국가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베니 무르다니 장군에게 원유도입에 대한 도움을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베니 장군은 장기적인 원유수급대책으로서 한국측이 직접 인도네시아 유전개발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직후 자카르타를 답방한 최성택 장군은 개발사업에는 많은 시일이 소요되니 우선 급한 대로 원유공급을 계속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베니 장군은 직접적인 유전개발 참여원칙만을 재역설하였다. 단, 한국측이 의향만 있다면 광구확보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확약을 하게 된다.
이러한 다짐을 받고 귀국한 최성택 장군은 1980년 5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 장군을 만나 유전개발의 필요성을 브리핑하였고, 전두환 장군은 긍정적인 의사를 표명하였다.
1980년 8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6개 광구로 쪼개져 있는 마두라 유전지역 중 노른자위인 ‘서부 마두라 광구(West Madura Block)’는 뻐르따미나 사가 자체 개발키 위해 유보하여 두고, 단지 ‘북동마두라 광구(North East Madura Block)’에 한해 국제입찰을 실시하였다.
이때 최성택 장군과 베니 무르다니 장군 사이에 이루어졌던 “광구확보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밀약에 근거하여 코데코 사는 응찰을 시도하였으나, 국제입찰에서 공식화된 입찰 보너스(Signature Bonus)의 현격한 차이로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 유니온(Union)사가 제시한 2천2백만 불에 비해, 코데코 사는 불과 3백만 불을 써넣었으니, 16개 응찰회사 중,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이와 같이 현실의 벽이 너무 높자,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최성택 장군, 최계월 사장은 당황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전두환 위원장은 박봉환 동자부 장관을 통해 최 사장에게 압력을 넣어 무슨 수를 쓰던지 광구를 확보하라는 특명을 내리게 된다.
서슬이 시퍼렇던 국보위 시절인지라, 최사장은 도리 없이 인도네시아 측의 실력자인 베니 장군과 접촉하면서 광구문제를 심각하게 협의하게 된다.
베니 장군의 입장에서는 최 사장의 입지도 살려야 했지만, 최성택 장군과의 밀약도 지켜야 하였던 만큼, 그 고육책으로 뻐르따미나 사가 단독 개발하기로 유보하고 있던 ‘서부마두라 광구’를 코데코사에 넘기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유니온 사의 4천만 불 입찰보너스 제안까지 거부하고, 뻐르따미나 사 단독으로 추진하려던 서부 마두라 광구를 3백만 불밖에 능력이 없다는 최계월에게 넘기기에는 너무나 높은 장애물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생산담당 이사인 뜨리술로(Trisulo)를 포함한 뻐르따미나 사의 경영진은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이를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니 장군은 “일본, 미국 일변도의 경제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원개발산업도 다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펴가며 “인도네시아 정부가 정치적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나섰다.
최후의 수단으로 베니 장군은 수하르또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한국과의 경제협력차원과 코데코 사가 인도네시아 투자 제1호 한국기업이라는 공적 등을 참작하여 대통령으로부터 그 광구를 코데코 사에 넘기라는 지시를 받아내게 된다.
이것이 5백만 달러의 입찰금으로 수의 계약된 6천4백60평방 킬로미터의 KE-2광구가 포함된 ‘서부마두라 유전(West Madura Block)’이다. 1980년 12월 가계약을 체결하고, 1981년 1월 코데코 사는 뻐르따미나 사와 50대 50의 지분구조로 운영권을 행사하는 조건의 ‘공동개발 합의 의정서’에 서명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한국정부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단군이래 최초의 해외유전 확보에 성공하게 된다.
이 엄청난 특혜는 전적으로 베니 장군과 수하르또 대통령의 결단과 특혜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관장하기 위해 1981년 4월 자본금 66억 7천만원의 ‘Kodeco Energy Co., Ltd.’가 자카르타에 설립되어 초대 기술담당부사장으로 경인에너지 경영자인 김영일박사가 영입되었으며, 직후 서울에서 열린 세계과학자대회에 참석한 재미교포 허문석 박사가 전두환 대통령의 추천에 의해 낙하산 타고 내려오자, 서부 마두라 유전개발사업의 ‘기술책임자’ 자리는 옥상옥(屋上屋)이 되어,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는 우를 범하게 된다.
어떻든 5공화국 초기엔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육사생도시절 결성한 ‘오성회(五星會)’ 멤버이던 최성택 장군을 통한 직통 라인이 개설되어 그런대로 끌고 나갈 수 있어 예상외의 결실을 맺게 된다.
즉 시추 4번째 공구에서 스트라이크(Strike)되어 시험 생산된 42만 8천 배럴의 첫 선적 원유가 태국 국적선 마운드 샴(Mound Syam) 호에 의해 1984년 8월 27일 오후 2시 여수항 호남정유 부두에 접안하게 되는 감격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최계월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임직원들에게 ‘오일맨’의 환상을 불어 넣기에 바쁘다. 그러나 우리에겐 너무나 과분한 치레였을까? 향후 운명을 점지(點指)라도 하는 듯, 궂은비가 내리는 암울하고 짓궂은 날씨 속에 최동규(崔東奎) 동자부 장관, 국회상공분과 위원장, 람리(A.R.Ramly) 뻐르따미나 사 총재, 수따르노(Sutarno) 석유가스총국장(Dirjen Migas), 에디 수쁘라(Edi Supra)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 등 150여 명의 내빈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원유선 갑판을 메우고 있었다.
식장엔 원로 극작가 한운사(韓雲史)가 작사한「마두라 송(Madura Song)」이 바로 1년 전에 「아! 대한민국」을 히트시켜 톱 가수 반열에 오른 정수라(鄭秀羅)의 옥타브 높은 목소리에 실려 신나게 확성기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마두라 유전에서 직접 생산된 시꺼먼 원유가 몇 방울씩 주입된 플라스틱 재떨이가 기념품으로 돌려지자, 이 희귀한 선물을 서로 차지하고자 쟁탈전을 벌여, 품절사태까지 빗게 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듯이, 요란한 첫 선적 축제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산 19,000배럴까지 올라가던 생산량이 갑자기 떨어진다는 급보가 시추선으로부터 무선통신망을 통해 타전된다. 공습이라도 당한 듯 비상이 걸렸다. 이 상황은 최종적으로 청와대까지 직보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압력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 전문회사에 용역을 주어 인공 펌핑(Pumping)시설도 하며 백방으로 해결책을 찾아 보았지만, 자연의 섭리를 어찌 인간의 얄팍한 임시방편으로 거역할 수 있으랴. 결국 일산 1,000배럴 이하로 떨어지면서 마두라 유전개발사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한국 동자부의 엄한 책임추궁에 따라 기술 실패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결론짓고, 기술담당 부사장인 허문석 박사는 해임된다. 즉 그 광구에선 일산 12,000배럴 정도가 적정 생산량인데 무리하게 19,000배럴까지 퍼 올림으로서 중간에 압력공백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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