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2일)
덥기만 하고 계절이 없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나라.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시작한 인니의 생활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한결같은 더위인줄 알았는데 미묘한 계절감이 있고, 인니의 떠오르는 태양과 저물어가는 하늘의 석양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가끔씩 귀밑에 꽂아보는, 깜보자가 날려주는 달콤한 향기는 몽롱한 낭만을 꿈꾸게 한다. 이렇게 조금씩 인니를 알게 되고 인니의 말들이 늘어가는 중에도 내가 잊지 못 할 세 가지의 단어가 있다. 이곳을 생각할 때마다 함께할 소중한 추억들이 될 이 단어들에는 인니에서의 아픔과 함께한 성숙, 배려에 대한 고마움,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유머가 있어서이다.
하나, cicak(찌짝)을 아시나요?
찌짝찌짝, 우는 소리가 이름이 되어버렸다는 파충류 과의 도마뱀이다.
인니에 발을 디딘지 한 주도 되지 않아 딸아이가 한 마리의 cicak과 친구가 되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 해서 이 곳 사람들은 집 안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나는 참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엄마, 얘가 cicak 이래. 넘 예쁘고 귀엽지…”라며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 얼굴에 cicak을 들이미는 딸을 보며 낮선 땅에서 호기심거리라도 찾아낸 아이에게 저리 치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알게 된 cicak 이란 단어, 아이의 cicak 사랑은 잠자리까지 데리고 갈 정도였다.
오고가는 교감은 살아있는 생명체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이가 애정을 쏟는 cicak은 우리 집 벽시계 뒤를 넘나들며 도망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면서 첫 주말을 맞게 되는 토요일 아침, 길 고양이 한 마리가 집 화단에 놀러 왔다. 신이난 우리 딸은 고양이와 금새 친구가 되어 한 참을 놀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야옹아! 내 친구야, 사이좋게 놀아야 돼. 하고는 살포시 고양이 앞에 놓아 주었다. 아뿔싸! 순간 울음바다가 되었다.
야옹이는 이게 왠 떡이냐며 날름 cicak을 삼켜 버렸다. 딸아이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눈앞에서 사랑하는 cicak 의 죽음을 보게 되니… “엄마, 어떡해? 나 때문이야, cicak이 심심해 할까봐, 답답해 할 까봐 야옹이랑 친구 하라고 놓아 주었는데..” 이후 딸아이의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동안 cicak 을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한 참이 지났다. 일기 쓰기를 좋아하는 딸아이에게 ‘ cicak 이야기도 한 번 써보렴’ 하였더니 금세 눈물방울이다. cicak 이란 단어가 딸에게 마음의 상처로 남고, 약육강식의 잔인함이 세상에 있는 것을 알았다 해도 cicak을 사랑했던 순수한 마음이 딸을 아픔과 함께 성숙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딸아이의 말처럼 인니어로 처음 알게 된 단어(동물)의 이야기다.
둘, Terimakasi, banyak (정말 고맙습니다)
교민지에 실린 국립공원 할리문 탐방기라는 글을 보고서 산행을 하기로 했다. 신혼여행을 한라산 완주로 잡을 만큼 산에 대한 미련이 많았던 우리는 에베레스트라도 오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출발했다. 지나보니 그것이 얼마나 산에 대한 경외심 없는 경박한 자만심이었는지…
공원 입구에 차량과 기사를 남겨두고 몇 백 명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여 등반을 시작했다. 어설픈 인니말로 산행하는 사람들과 짧은 인사도 나눠보고, 누군가 국적을 묻기에 korea라고 하자 oh! korea, seoul! 할 때는 울컥 하였다. 내가 서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렇게 울컥하는 애국자였던가?
대부분의 산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좁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빽빽하고 거대한 나무들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였다.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아이에게 화산의 온천물에는 계란도 삶아 먹을 수 있다고 꼬드기며 오르기를 더 하니 밀림이었던 숲속에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흰색의 흙과 고목처럼 되어버린 나무들이 여기저기 나 뒹굴고 있었다. 신기했다. 화산 폭발의 흔적이란다. 그런데 여기도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였다. 조금 더 가니 진흙 길이다. 화산이 진흙도 분출한다더니 머드팩하기 딱 좋아 보이네! 생각하며 또 오르기를 반복,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화산이 펼쳐지고 미처 챙겨가지 못한 주인 없는 계란도 한 편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도전에 따른 성공의 성취감과 생소한 자연 현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느끼며, 기념 촬영을 하고 화산 옆에서 준비해 간 김밥을 먹느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살피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얼핏 주위를 둘러보니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하산을 하기에 우리도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저만치서 먹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남편이 아이를 들쳐 업었다. 머드팩 하기 좋겠다. 라고 낭만스럽게 생각했던 진흙길은 비로 미끄러워져 엄청난 걸림돌이 되고, 아이를 업고 가는 남편의 뒷모습에는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빗줄기도 강해져가며 올라올 때 웃고 즐기며 손을 담그던 물길은 거칠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아빠의 등에 매달려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아이의 등을 애처로워 할 겨를도 없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주위엔 우리 셋 뿐 이었고 무섭게 내려가는 남편을 따라잡으려다, 미끄러지며 깨진 무릎사이로 흐르는 피를 수습할 정신도 없었다. 흙탕물은 이미 종아리까지 차올랐다.
더 이상은 한 발자욱도 떼 놓을 수 없을 만큼 지친 우리는 기적처럼, 물에 아직 잠기지 않은 작은 땅을 찾아내었다. 셋이 발만 딛고 설 수 있는 넓이였다. 천둥소리, 거센 빗소리, 까딱 잘 못하면 휩쓸릴 물길 사이에서 어둠을 밝힐 랜턴도 비상식량도 없었고, 온천서 발 담그며 놀자고 준비한 수건이나 여벌의 옷도 이미 젖어 있었다. 휴대폰의 충전 상황이 아슬아슬 했지만 끊어지고 이어지길 반복하는 시도 끝에 지인과 통화가 되었다.
할리문 산 중턱쯤 된다는 두루 뭉실한 위치설명과 긴박한 상황을 겨우 전하고는 ‘도와주세요!’ 를 외쳤다. 그리고 마지막 한 곳..기사와 통화가 연결되었다. 인니어 라고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는데 Help Me.
Tolong!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전원마저 꺼져버렸다. 만감이 교차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부부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었다. 남편은 잠시, 혼자 길을 찾아보겠노라고 무서워하는 우리를 다독이고 길을 나섰다. 공포에 떨어 흐르는 시간조차 헤아리지 못하던 때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는 맨발의 기사가 홀딱 젖은 채 올라오고 있었다.
생명줄 같던 기사 RAMAT 모습. 힘들었을 남편을 대신한다며 날카로운 돌길에 아이를 들쳐 엎고 맨발로 내려가기에 ‘힘들겠다, 아이를 내 등에 업혀 달라’는 남편의 요구에도 괜찮다고만 한다.
어려운 하산 길에 구조요청을 받고 올라온 국립공원 직원의 친절함도 고맙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떨고 있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긴 잠바를 걸치라고 건네주던 따뜻한 배려까지 잊을 수가 없다. 묻는 말의 절반은 빙긋한 웃음으로 대답하며 한결 같이 순박하고 예의바르고 진솔한 청년이다.
깜보자가 성실과 순수의 꽃말을 가진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 기사는 그 성실과 순수를 대표하는 인니 사람이다. 그는 지금도 우리의 차를 운전해주고 있다.
인니의 자연을 가벼이 생각하여 호되게 당한 나에게 인니의 따뜻한 인정을 알게 해준 RAMAT으로 내 인도네시아 생활의 이질감과 두려움이 참 많이 사라졌다.
Terimakasi, banyak, Ramat!!
셋, KOSONG은 진주가 아니야
사야할 물건이 생겼다. 정보 수집결과 pasar 에 가면 어지간한 물품의 구입은 가능하다 하여 무조건 나섰다. 한국의 시골 5일장 같은 순박한 느낌이랄까? 2층 건물 중 지하에서 1층까지 모두 살펴보아도 찾는 물건이 없었다.
인니생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즈음, 인니어의 단어 선택에 제한이 많았던 나는상가 사람에게 2층에는 뭐가 있으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묻게 되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나에게 친절하게도 상가 사람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를 하였다.
다시 나는 더듬거리는 영어와 아는 인니어 단어들과 불쑥 나오는 한국어까지 총 동원하여 계속 2층을 궁금해 하자 인니사람은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는가 싶더니 다시 한 손으로 손목을 잡아 보이기도 하면서 손사래와 함께 꼬송이라는 말을 연거푸 하였다. 몸짓, 손짓 그리고 여러 가지 언어가 오고가는 상가사람과 나의 소통되지 않는 행동들에 주위 사람들이 모여들어 킥킥 웃었고, 십여 분을 서로 답답해하다가 bodylange를 남들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그제 서야 답을 찾았다. “ 아하 진주, 진주 가게가 있다는 거구나.”
아까 목을 감쌌지. 그건 진주목거리, 한손으로 다른 손목을 잡았지. 진주 팔찌..그래 진주 파는 곳이로구나. 응. 맞아. 인니어로 KOSONG은 진주로군. 그렇게 철석같이 생각한 나는 그래 진주를 사려는 것이 아니야.
KOSONG은 내가 찾는 물건이 아니야”라며 (물론 이것도 완벽한 문장의 의사 표시는 아니었지만) 집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후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인니어에 대한 지식이 조금 더 쌓였을 때, 몸짓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는 것이며 KOSONG은 비었다는 뜻이었다. 그 날 그 Pasar에서 재밌게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시장 한 복판에서 내가 멋진 원맨쇼 한 장면을 선물 한 것을 알았다.
이렇게 실수와 당황을 반복하며 나의 인니 생활은 점점 익숙해져가고 하나씩 추억을 쌓아가고 있다.
맞아! 그런데, KOSONG는 진주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