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아이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비밀이 있다. 어른이 된다고 하여 모두 어른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이가 많아지고, 행동을 절제해야 하는 책임감을 조금 더 느낀다 뿐이지 진정 마음 속에서 ‘아이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사람들이 혹은 내 자신이 때때로 아이들보다 더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좋은 쪽으로 말하면 동심이 살아있는 것이고, 나쁜 쪽으로 말하면 우리는 어른(adult)이 된 것이 아니라 어른아이(adult child)가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2014‎년 ‎6‎월 ‎16‎일)

특별기획

장세라 41아동심리치료사
자카르타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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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마음속에 아이가 울고 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상처받아 울고 있는 내면아이가 살고 있다. 내면아이란 어린 시절 상처받은 우리의 모습이 그 시각 그 모습 그대로 우리 내면에 자리잡아 우리 행동과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틀러를 예를 들어 보면, 히틀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력을 경험했고 이러한 유년시절을 보낸 히틀러는 훗날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

매우 극적인 예시이지만, 우리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는 이처럼 우리 인생 어느 순간 갑자기 출몰하여 극단적으로 그 아픔을 표현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저자는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폭력과 잔인함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마음 속 내면아이는 우리가 들여다보고 그 아이가 가진 상처에 대해 직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울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과도한 화로, 고집부리는 태도로, 자신을 의식 또는 무의식 중에 학대하는 태도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한다.

이쯤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난 비교적 괜찮은 어린 시절을 보냈어. 난 아무 상처도 없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가 어린 시절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고 단언하는 것부터가 이미 괜찮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하는데, 아마 내 아픔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합리화 혹은 부인 등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일 수 있다.

완벽한 부모란 있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제공해주는 자녀의 어린 시절이 아무런 상처 없이 늘 유토피아 같을 수는 없다.

꼭 학대나 폭언, 감금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상처가 되었을 만한 상황과 부모의 태도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 에게는 양쪽 부모가 항상 바빠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 못했던 시간이, 누군가 에게는 고집스러운 부모로 인해 자신의 의견은 항상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간이, 누군가 에게는 다른 형제와 비교당하던 시간이, 누군가 에게는 은근한 방임으로 공허함을 느끼던 어린 시절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상처받은 내면아이’로 내면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면아이를 안아주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그렇다면 우리의 무의식이 방어기제까지 사용하면서 건들지 않으려 하는 내면의 상처를 왜 굳이 돌아봐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내면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일시적인 안녕이 아닌 진정한 나의 안녕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나의 상처가 내 자녀에게 되물림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희한하게도 우리 내면아이는 그 아픔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면 상처를 회복하고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내면아이를 외면하는 이유는, 몰라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잘못을 직면해야 하는 스스로에 대해 자책감과 모멸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처가 깊어 아예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고 참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내 내면아이를 돌보는 일이 내 부모님의 잘못을 따지고 원망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도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상처가 되었던 부분들을 돌아봐주고 내가 아팠을 그 시간을 이해해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의 감정과 아픈 상처를 이해 받으려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때때로 상대가 나의 감정과 상처를 공감해주지 못하는 모습에 화를 내고는 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먼저 이해 받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의 아픔을 직면하고 이해해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그 때 얼마나 아팠을 지를 이해하고 토닥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내면아이는 슬픔을 털고 성장하게 되며, 우리 인생을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미래로 향하게 한다.

부모님이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여 항상 집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강요 받은 자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시간이 상처가 되어 내면아이로 머물게 되었다면, 이 자녀는 훗날 스스로의 자녀에게 동일하게 조용히 지낼 것을 강요하는 부모가 되거나 혹은 ‘조용함’을 강박적으로 싫어하여 자녀가 매우 소란스럽게 자라도록 양육하는 부모가 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선천적으로 자녀가 조용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투사하여 다른 형제에 비하여 유독 조용한 자녀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게 된다 던지 혹은 필요이상의 연민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나의 내면아이를 돌보아주지 않으면 대인관계에서, 가족 간의 관계에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내 내면아이가 언제 어떻게 출몰하여 영향을 미칠지는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내면아이를 직면하고 돌보게 되면 자녀양육 시 문득 등장하는 놀라운 나의 행동이나 생각들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깨달아 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내 안에는 몇 살배기, 어떤 모습의 내면아이가 살고 있는가? 그 아이의 상처받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안아주도록 해보자. 나를 올바르게 사랑해줄 수 있는 부모가 자녀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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