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 故 사르워 에디 위보워, 국가 영웅 추서

2025년 국민 영웅 칭호를 받은 AHY 장관의 할아버지인 초대 주한대사 사르워 에디 위보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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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9·30 공산쿠데타’ 진압 공로 인정…프라보워 대통령, 2025년 국가 영웅 공식 지정
–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대통령의 장인…초대 주한 대사로 양국 관계 초석 다져

[자카르타=한인포스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SBY)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장인이자 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를 역임한 故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e Wibowo) 장군이 2025년 정부로부터 ‘국가 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번 추서는 1965년 9월 30일 발생한 공산 쿠데타 시도 사건 당시, 그가 군 핵심 지휘관으로서 국가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세운 지대한 공로를 인정한 결과이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2025년 11월 10일 대통령궁에서 열린 국가 영웅 추서식에서 사르워 에디 위보워를 포함한 10인에게 국가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이는 ‘국가 영웅 칭호 수여에 관한 2025년 대통령령 제116/TK/2025호’에 따라 공식 지정된 것이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이날 기념 연설에서 “오늘 우리는 조국 인도네시아의 독립, 주권,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웅들의 숭고한 정신과 공적을 기리고자 한다”며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번영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번 칭호 수여의 의미를 밝혔다.

사르워 에디 위보워의 국가 영웅 추서는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던 1960년대 그의 행적에 대한 국가적 재평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9·30 사태’의 해결사, 군인 사르워 에디

사르워 에디 위보워는 1927년 7월 25일 중부 자바 푸르워레조에서 태어났다. 일본 식민 통치기에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군사 조직 향토방위의용군(PETA)에 입대하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후에는 국군(TNI)의 전신인 인민치안대(BKR)에 합류하여 군 경력을 이어갔다.

그의 군 경력은 디포네고로 사단 대대장, 국립육군사관학교 부연대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아흐마드 야니 중장과의 깊은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육군특전사령부(RPKAD, 현 코파수스) 참모장에 이어 1964년 사령관으로 임명되며 인도네시아 군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공산 쿠테타로 희생자가 매립된 ‘루방 부아야 우물 (Sumur Lubang Buaya)’

그의 이름이 역사에 깊이 각인된 계기는 1965년 10월 1일 발생한 ‘9·30 공산 쿠데타 사태’였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추종 세력이 아흐마드 야니를 포함한 6명의 장성을 납치, 살해하며 쿠데타를 시도하자, 당시 육군전략예비사령부(코스트라드) 사령관이었던 수하르토 소장은 사르워 에디와 그가 이끄는 RPKAD에 반격 작전을 명령했다.

사르워 에디의 부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쿠데타 세력이 장악했던 자카르타 중심부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RRI)과 통신 건물을 성공적으로 탈환하여 정부의 통제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쿠데타의 본거지였던 할림 페르다나쿠수마 공군기지를 10월 2일 장악하며 사태를 조기에 진압했다. 이후 동자카르타 루방 부아야에서 쿠데타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중부 자바 지역까지 공산당 잔존 세력을 소탕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초대 주한 대사 부임과 외교관으로서의 삶

9·30 사태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군부 내 입지를 다졌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수하르토와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후 그는 파푸아 지역 사령관, 통합군사관학교 총재 등 군 주요 보직을 맡았으나 점차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졌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 전경. 사진 인니 외교부

결정적으로 그는 1974년, 군복을 벗고 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 인사는 그의 정치적 야망을 우려한 수하르토 대통령이 그를 중앙 정치 무대에서 격리시키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사르워 에디는 외교관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초대 주한 대사로 재임하며 대한민국과 인도네시아 양국 간 외교 관계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외무부 감찰관을 역임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족적을 남겼다.

SBY 대통령과 아니 여사

그는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장녀인 크리스티아니 헤라와티(아니 유도요노)는 제6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와 결혼하여 영부인이 되었다. 이로써 사르워 에디는 인도네시아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의 뿌리가 되었다.

손자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 농지공간기획부 장관 재직

대한민국 국경일 ‘팀 코리아-인도네시아’ 리셉션에서 아구스 장관 기념사.2024.10.01.사진 한인포스트

2024년 한국 국경일 행사에서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Agus Harimurti Yudhoyono) 농지공간기획부 장관은 한국은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한때 할아버지인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e Wibowo)가 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로 재직했던 곳이라고 전해 박수를 받았다.

또한 아구스 장관은 “어머니인 고 Ani Yudhoyono여사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2년을 보냈다”면서 “그래서 한국은 우리 마음 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양국의 우호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고 공유 가치와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구축되기를 바란다”면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대표해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와 따뜻한 인사를 전하고 싶다.평화롭고 번영하는 미래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하며 군인으로서, 또 외교관으로서 조국에 헌신했던 사르워 에디 위보워는 1989년 11월 9일 62세의 나이로 별세했으며, 고향 푸르워레조에 안장되었다. 그의 서거 36년 만에 이뤄진 이번 국가 영웅 추서는 그의 역사적 공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후대에 그의 헌신을 기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남긴다. (편집부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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