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당선자가 10일 새벽 당선이 확실시되자 서울 광화문 세종로공원에서 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손을 흔들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9일 치러진 대선에서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문재인 후보는 개표 초반부터 줄곧 우세를 보이며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를 비교적 큰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문 후보의 승리로 9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진보 성향 야당은 다시 권력을 위임받아 국민 다수의 꿈과 바람을 실현할 책임을 안게 됐다.
문 후보의 승리는 무엇보다 국민이 ‘촛불혁명’ 과정에서 드러난 시대적 열망을 구현할 조타수로 ‘문재인과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선택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의 구호는 그런 열망을 적절히 반영한 것이었다.
지난겨울 촛불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들은 단순한 정권 퇴진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대개조를 요구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진보·보수 정권을 거치면서 날로 심화한 양극화로 인해 국민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왔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은 갈수록 심해지는 불공정과 ‘갑질’ 사회, 부익부 빈익빈을 향한 국민적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은 단순히 3기 민주정부를 넘어 총체적인 국가 개조, 격차사회 탈출을 위한 대장정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보수 정권 국정농단’에 대한 준엄한 심판
이번 대선 결과는 또한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더 나아가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 9년에 대한 국민적 심판의 의미를 지닌다. 홍준표 후보가 문 당선인에게 큰 표차로 패배함으로써 전통적인 보수 세력은 눈에 띄게 퇴조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은 보수 정권 9년간 쌓여온 적폐가 곪아터진 것이다. 국민은 이번 선거에서 정치·경제·사회·외교안보 등 각 분야의 9년 실정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었다.
이번 대선으로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여→야→여→야로 이어지는 두번의 정권교체가 완성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으로 야당으로의 첫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2007년엔 옛 여권인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으로 다시 정권이 넘어갔다.
그로부터 9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야당 세력이 다시 정권을 찾아옴으로써 우리나라도 국민 선택에 따라 정권을 주고받는 게 자연스런 정치문화를 뿌리내릴 수 있게 됐다.
대세론을 바탕으로 한번도 1위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던 문재인 당선인은 마냥 기뻐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너무나 많은 난제가 앞에 놓여 있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북핵 위기 와중에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의 치명적 공백 상태가 오랫동안 이어졌고, 경제는 장기적인 경기침체 속에서 서민·중산층의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재벌을 개혁하고 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바로 세우자는 국민적 요구도 거세다. 이렇게 국가적 난제가 산적해 있으나 국회는 여소야대고, 대선 와중에 정치권은 서로 적대감만 키웠다.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다.
협치를 통한 개혁, 연대를 통한 청산
문재인 당선인이 취임 후 무엇보다 유념해야 할 건 협치를 통한 개혁과 연대를 통한 청산이다. 개혁도 청산도 ‘협치와 통합, 연대’ 없이는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문 당선인이 유세에서 적폐 청산과 국민 통합 두 가지를 번갈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문 당선인이 대선에서 큰 표차로 승리하긴 했지만, 정치적 세력분포로 보면 여전히 혼자서 모든 것을 하기는 힘들다. 문 당선인은 과반엔 미치지 못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득표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일을 추진하되 모든 것을 혼자서 하려고 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문 당선인 스스로 선거운동 과정에서 밝혔듯이 집권 이후 우선적으로 국민의당·정의당과 연정 또는 협치를 모색하는 게 바람직하다. 보수 정권 실패에 대한 국민 반발 속에서 진보개혁 정치세력의 폭은 과거 어느 때보다 넓어졌다.
이번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후보의 득표율을 모두 합하면 자유한국당·바른정당 득표율을 두 배 이상 압도한다. 문 당선인은 우선적으로 이들 두 정당과의 협력관계 구축에 주력해야 한다.
문 당선인은 자신을 찍지 않은 보수 성향 유권자들도 포용하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말로만 ‘100%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반대파를 탄압했던 ‘배제의 정치’는 이젠 끝내야 한다.
국정 운영에서 원칙과 기준을 잃지 않되 보수 유권자의 마음과 정서를 세심히 살피길 바란다. 원내 2당인 자유한국당과도 대화의 문을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의회민주주의에 입각한 다수결 원칙에 따라 결정을 내리면 된다.
자유한국당도 과거 야당 시절 했던 것처럼 새 정부 출범 초기부터 사사건건 발목잡기에만 몰두할 경우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북핵 위기 대처에 최우선
순위 두어야
새 대통령에게 발등의 불은 무엇보다 정부와 청와대 진용을 짜는 일이다. 정부 인선에서부터 ‘협치를 통한 개혁, 연대를 통한 청산’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문 당선인은 유세 때 “집권하면 야당부터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오늘 대통령에 취임하면 약속대로 야당들을 우선 방문해, 정부 구성에서부터 의회 협력방안까지 모든 현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길 바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취임 뒤 당내 경선에서 경쟁했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에 앉힌 것을 참고해도 좋다.
더불어민주당 경선의 경쟁자뿐 아니라 야당에서도 유능한 인재를 골라 쓰겠다는 자세로 내각 인선 구상을 진행하는 것이 좋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곧바로 매달려야 할 현안 중 최우선 순위는 외교안보 분야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으로 한반도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급박하게 움직이면서 북한 핵 위기는 중대 갈림길에 접어들고 있다. 더구나 남북 관계는 이미 파탄 상태다. 자칫 잘못하면 구한말처럼 우리의 운명을 주변 강대국에 내맡기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대통령 과업 중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민 안위를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문 당선인은 취임하자마자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대북정책에서 한국 역할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안부터 모색해야 한다.
건강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중국·일본 등 주변국과의 관계도 호혜평등 원칙에 따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북한에 단호하면서 유연한 자세로 접근해 남북 관계의 새 국면을 열어젖혀야 한다.
대선 전 실전배치 단계까지 들어간 사드 문제는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미국·중국 등 관련국과 폭넓게 협의하고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한다.
국민 하나로 모아 개혁정책
추진하길
문 당선인은 실망에 빠진 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일자리의 질은 전반적으로 나빠지면서 내수 부진으로 우리 경제가 장기 침체로 빠져드는 추세를 반전시켜야 한다.
단기간에 실현하긴 어려운 일이다. 재벌기업의 투자와 수출 지원에 혜택을 집중하고, 건설경기 부양으로 성장률 수치나 높이는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쟁과 혁신이 살아나고 가계 소득이 늘어 민간소비가 살아나는 경제구조를 만드는 방향으로 지속적인 정책을 펴지 않으면 안 된다.
촛불시위부터 대통령 탄핵, 대선으로 이어진 드라마는 ‘시민혁명’이라 일컬을 만큼 역동적이었다. 새 정부는 ‘개혁 정책’으로써 시민의 ‘혁명적 바람’을 담아내야 한다.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고 흔히 말한다. 개혁의 열매를 맺는 일은 훨씬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국정농단 세력과 그 추종자들이 다시는 한국 정치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권력기관은 물론이고 재벌과 언론 역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게 개혁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국민의 힘을 모아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게 바로 지도자의 몫이다. ‘새 대통령 문재인’을 중심으로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촛불 혁명’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나가길 기대한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