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은 인도네시아 공산당 일일 쿠데타 날

(Hari Peringatan G 30 S/PKI)

1965년 9월 30일은 9.30 사태 혹은 9.30 쿠데타(G30S/PKI)가 발생한 날이다.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Partai Komunis Indonesia)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부의 진압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간 뒤, 이들과 연계가 있다고 의심되던 수카르노 대통령이 서서히 실각하고 진압을 주도한 수하르토 장군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인도네시아 내 공산주의는 네덜란드 식민지배 시절인 1914년 네덜란드인 Sneevliet가 ISDV (Indische Sosial Democtische Vereenining/인도네시아사회민주협회)를 구성하며 시작되었고 1926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탄생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육군은 1956년부터 58년에 걸친 반란 사건으로 인해 영향력이 크게 감소해 있었다. 인도네시아 최대의 친미 및 우파 세력이던 육군은 반란 진압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세력이 커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육군의 힘은 반란으로 인해 위축되었고 적극적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반란은 아울러 인도네시아의 주요 정당 몇 개를 반란가담 혐의로 해산시키면서 정치체제 그 자체를 뒤흔들게 되었는데 이로서 급부상한 것이 PKI, 바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다.

독립 후 수카르토 초대 대통령 재임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그 당원이 3,500,000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 정당이었다. 또한 청년단체, 노동조합, 여성단체, 학자단체 등 다수의 단체들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를 표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육해공군과 경찰이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정부에 이를 제외한 제5병력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 병력이 만들어지면 공산당 당원들과 지지자들에 주요 직책을 맡겨 정권을 취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의 속내를 눈치 챈 고위급 군 관계자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한편 1965년에 들자 수카르노 전 대통령은 자주 노환에 따른 질병에 시달렸다. 또한 그 즈음해 흉작과 대규모 인플레이션으로 사회불안 역시 가중되었다.

Monumen sejarah G30SPKI그런 상황에서 1965년 9월 30일, 인도네시아 공산당 PKI는 총궐기를 단행한다. 미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 군부를 타도하고 공산 인도네시아를 건설하자는 명분 하에 PKI는 최우선적으로 인도네시아 육군의 고위급 장성 암살에 주력, 쿠데타 당일 이미 여섯 명의 장군들이 암살당한다.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Ahmad Yani) 준장과 다른 육군고위급인사들, 수쁘랍또 (Suprapto) 소장, 하르요노 (MT Haryono)소장, 시스원도 빠르만 (Siswondo Parman)소장, 빤자이딴 (DI Pandjaitan)준장, 수또요 시스워미하르조 (Sutoyo Siswomiharjo)중장이 바로 그들이다.

공산당원들은 이들을 납치해 동부 자카르타 루방부아야 (Lubang Buaya)지역으로 데려가 살해한 후 시신은 우물에 던져 버린다.

육군의 지휘체계를 무력화하는 것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공산당은 다른 장성들의 암살에는 실패한다.

이에 인도네시아 육군은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하고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섰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종결되었고, 공산당 게릴라들은 뿔뿔이 도망쳤으며 지휘부는 일제히 중국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이후 살해당한 아흐맛 야니 육군사령관을 대신해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육군사령관에 임명된다. 또한 병환이 심해지자 수카르노 전 대통령은 1966년 3월 11일 수하르또 사령관에 국가통치권한을 넘겨주게 되는데 이를 수퍼르스마르(Supersemar/3월 11일의 명령)라 부른다.

그렇게1966년부터 정부를 손에 쥔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68년에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반공 친서방으로 노선을 급격히 전환하며 장기독재를 시작하게 된다.<편집부>

<영화-공산당 구테타 G 30 S/PKI. 3시간30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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