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아세안에서 잘 안 보인다.” 얼마 전 만난 태국 디지털경제정책을 현장에서 실현하는 핵심 기관인 디지털경제진흥원(DEPA) 고위 관계자가 ‘한국은 세계 최초로 5세대(5G)를 상용화한 나라’라는 기자의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 말이다.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 등 중국 기업들의 ‘구체적인’ 투자 행보를 듣고 나서야 그가 왜 저렇게 시큰둥해 했는지 수긍이 갔다.
화웨이는 지난 2월 태국 경제특구인 동부경제회랑(EEC)에 500만 달러(약 60억 원)를 투입해 5G 이동통신 테스트베드(시험장)를 구축했고 이제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화웨이는 또 태국 정부와 자국 최대 에너지 국영기업 PTT그룹이 야심 차게 조성 중인 태국판 실리콘밸리 ‘왕찬밸리’에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5G 기술을 도시에 통째로 적용하는 스마트시티 사업에선 푸껫 개발 로드맵을 담은 ‘백서’를 지난달 발표해 태국 정부를 홀렸다.
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백서는 스마트시티 시장을 발 빠르게 선점하고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화웨이에 DEPA가 귀띔해주면서 탄생한 것이다.
태국뿐만이 아니다. 무역전쟁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미국이 국가 안보 우려를 이유로 동맹국 등에 화웨이를 배제하도록 압박하고 있지만 아세안에선 화웨이가 곳곳에 어른거린다. 필리핀 대형 이동통신사 글로브텔레콤은 화웨이 장비를 대거 도입해 6월 아세안 최초로 5G 상용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미얀마 등도 화웨이와 손잡고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5G 사업자 입찰에서 화웨이와 ZTE 등 중국 기업들에 문을 열어줄 예정이다.
5G 기지국 등을 자력으로 개발하겠다는 베트남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아세안 국가에서 5G 사업은 중국, 즉 화웨이로 통하는 분위기다.
세안을 공략하는 화웨이의 최근 특징은 돈 보따리뿐 아니라 구체적인 액션 플랜과 ‘실낱 같은 기회(slim chance)도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화웨이는 미•중 무역갈등으로 코너에 몰리자 투자 결정에 가속도까지 붙었고, 투자 유치에 목마른 아세안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렇다 보니 듣기는 좋지만 실천력이 떨어지는 한국과 아세안 간 양해각서 정도론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어렵고 시장 영향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아세안에서 틈새시장을 노려 왔지만 5G 관련 산업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따돌리고 판을 주도할 수 있다. 한국의 세계 최초 5G 상용화 타이틀이 아세안에서 힘을 받으려면 화웨이와 차별화된 투자 전략이 절실하다.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