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감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보는 것이다” 대한 독립 74주년에 맞아 총기가 아닌 무역전쟁을 하고 있는 한-일 모든 위정자들이 감성팔이 정치를 하는 민감한 시기에 영원히 역사속에 묻힐뻔 했던 적도의 대한독립열사와 위안부의 현장을 조명하고자 한다. 항일이지 반일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아픈 역사를 철저히 기억하여 교훈을 삼아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일제의 잔악한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며,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 애국선열의 얼이 우리 혼에 스며들길 바란다. <편집부. 자료 사산자바문화연구원 제공>
강제징용 인도네시아 한인 진출
인도네시아 한인 진출 역사는 일본이 당파싸움으로 국력과 정체성이 없어진 조선을 강제로 합방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1942년 3월 5일 2만명의 군사로 인도네시아를 무혈점령했다. 9만여명의 연합군 포로를 감시원으로 조선 청년들을 징용한 아픈 역사가 첫 걸음이다.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에는 많은 연합군 포로들이 있었다.
일본군은 9만여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죽이자니 아무리 전쟁이지만 대학살이고, 살려 두자니 반격이 두려웠다. 일본군으로서는 통제가 불가하자 1941년 12월 육군성에 포로 감시원 정보국을 신설하고 동남아에서 대두되는 연합군 포로 문제를 다루게 되고, 1942년부터 조선과 대만에서 월급 50엔이라는 유급 연합군 포로 감시원을 모집하게 된다.
하지만 지원자가 많지 않자, 일본은 조선의 각 도 읍면장 경찰서 주재소에 포로감시원을 할당하게 되면서 강제징용하게 된다.
연합군을 감시하기 위해선 학력이 있어야 하기에 사전 신분 조사를 하여 각 주재소에 오더를 내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1942년 5월에 조선과 대만에 포로 감시원을 모집하고, 1차 모집된 포로 감시원 3,016명은 육군 부산서면 임시 군속교육대 누구치(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 통칭 野口부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6천톤급 브리스베인 호와 10척의 화물선은 지그재그 항법으로 1942년 8월18일 포로수용소가 있는 필리핀.버어마.태국.뉴기니.싱가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로 출발하였다.
3016명의 군속들은 동남아 나라에 배속되고 민영학 등 한인 군속(軍屬) 1,400명은 조선 성노예 소녀 23명과 함께 1942년 9월 14일, 26일만에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 바따비아(자카르타)의 딴중 쁘리옥(tanjung priok)항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조선 포로 감시원들은 스마랑 암바라와 반둥 보고르 찔라짭 찌마히 족자 수라카르타(솔로) 배속 된다. 이들은 포로 감시병뿐 아니라 의무관 인도네시아 보병 훈련 등 임무도 맡게 된다.
적도의 대한독립열사와 조선 위안부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모워노 보병 훈련장 성요셉성당 그리고 암바라와성(Fort william I)이 이곳에 있다.
고려독립청년당
고려독립청년당을 만들고 이끈 총령 이억관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하다 중국어와 일어에 능통했다. 고려독립청년당의 조직은 총령 이억관, 군사부장 김현재, 조직부장 임헌근, 세마랑지구 책임자 이상문, 암바라와 지부장 손양섭, 암바라와 부지부장 조규홍, 자카르타 지부장 문학선, 자카르타 부지부장 백문기, 반둥 지부장 박창원, 반둥 부지부장 오은석 등이 선임되었다. 총령인 이억관은 고려독립청년당의 강령, 선언문, 당가(黨歌)를 직접 작성했다. 귀국 후 리더십이 강했던 이억관은 해방 후 홍콩으로 간다는 이야기만 남긴 채 사라졌다.
스모워노 보병 훈련장
스모워 보병훈련장은 스마랑에서 41km 떨어진 해발 2.520m 웅아랑산 중턱 반띠르 고원에 있다. 이 보병훈련장은 네덜란드 식민시대 지어진 목조 건물로 일본이 점령하면서 조선 포로 감시원 청년들을 통해 인도네시아인 태평양 전쟁 보병을 훈련시키던 장소로 항일운동조직 ‘고려독립청년당’이 조직되었던 곳이다.
암바라와 성요셉 성당
네덜란드시대 건립된 민관 종교건물 성당으로 일본이 점령하면서 스마랑 제2분견소로 쓰면서 이곳에 무기고를 두고 수녀원과 학교는 병영으로 사용했다.
일본은 네덜란드가 350년간 통치하면서 인도네시아에 건축한 군 시설과 공관 건물들은 포로 수용소로 쓰면서 정작 무기고가 있는 분견소는 암바라와 성요셉 성당 찌마히드 익나띠우스 성당 등 종교시설을 사용했던 아이러니한 이유는 이렇다. 성당의 모든 시설은 일본군이 분견소로 쓰면서 성당 본당 예배실은 미사를 보게 했다고 암바라와 성당의 원로 위나르디(1935년생)이 증언했다.
이 성당의 대한독립열사의 거사가 있었던 곳이다. 또 다른 찌마히 산또 익나띠우스 성당의 경비원의 말에도 의하면 연합군이 종교 시설은 폭격 안 할거라는 전략으로 신자들을 인질로 쓴 것이라고 말했다.
암바라와 성
스마랑에서 솔로 방향으로 40km를 달려가면 적도의 대한 독립열사와 위안부의 역사가 세월의 이끼속에 전쟁의 상흔만큼이나 폐허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남아 기자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1800년대 건축한 네덜란드성(Fort william I)으로 일본군 성노예 조선 위안부가 있던 곳이다.
암바라와 초등학교 앞 위생창고 자리
1.750m 거리로 암바라와 성 조선 위안부 수용소와 500m 앞에 있는 곳으로 민영학 열사가 자결한 수수밭과 80m 거리다. 손양섭 열사와 민영학 열사가 서로 방아쇠를 당겨 산화한 곳이다.암바라와 결
핵병원 앞
스마랑 제2분견소인 성요셉 성당과 1.750m 거리로 암바라와성 조선 위안부수용소와 500m 앞에 있는곳으로 민영학 열사가 자결한 수수밭이 있던 자리다.
암바라와 거사
일본 군속으로 조선 포로 감시원 2년 계약에 50엔 월급을 받기로 하고 왔지만, 일본은 이를 이행하지 않고 항의하는 조선 청년들을 짐승 취급하자 급기야 반발이 심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스마랑 수모워노 보병 훈련장에서 지독한 훈련을 통해 사상개조의 강공법을 택한다.
계약조건에서 강제 훈련이 심할수록 애국심이 높아갔고, 위장 지원을 하고 이 때를 기다리던 이활을 중심으로 항일 동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44년 12월 29일 사상개조 훈련이 마치던 날 수모워노 보병훈장 취사장에서 이활(본명 이억관)을 총령으로 13명의 동지들이 모여 혈서를 쓰고 당가를 부르고 맹서하며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항일운동 조직이 탄생한다.
35명의 조직원 결성이 되며 반둥 스마랑 암바라와 등 지부에 지부장까지 두고 이듬해 1월 8일 딴중 쁘리옥에서 싱가폴로 가는 연합군 포로 수용선을 탈취하여 연합군쪽으로 넘기는 거사 계획을 세우지만 심재관의 밀고에 의 실패로 돌아간다.
일본은 항일 조선청년들이 늘어나자 싱가폴 말레이시아등으로 군속들을 발령하게 된다. 1945년 1월4일 고려독립청년당의 핵심 멤버인 암바라와의 민영학 손양섭 노병한은 말레이시아로 발령을 받게 된다.
3인 열사는 급기야 스마랑 제2분 분견소안 암바라와 성요셉 성당에서 스마랑 8km에서 운전병을 죽이고 차를 돌려 분견소의 무기고로 돌아와 부켄 기관총과 탄환 3천발을 탈취하게 된다.
이후 어용상인 억류소장 형무소장등 12명을 죽이고 사흘째 되는 날 스마랑에서 지원된 일본군 30명과 인니 양성군인 800명에게 포위되자, 자신의 안전을 위해 게릴라전을 펼 수 있는 웅아랑산 밀림도 택하지 않고 허허벌판에 있는 암바라와 성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때까지 10명 남은 조선 위안부 소녀를 구하러 가다가 위안부 수용소 500m 전방인 분견소에서 1.75km에서 민영학 열사가 좌측 대퇴부에 총상을 맞고 수수밭(현재 암바라와 결핵 병원앞)에 숨었으나 포위당하자 방아쇠를 자신의 심장에 당겨 전사한다.
동지를 응급처치하려고 80동 거리의 위생창고로 갔던 손양섭과 노병한은 민영학의 자결 총성이 끝나고 진압군이 포위해 오자 자결하게 된다. 현재 암바라와 초등학교 앞 위생창고는 헐어지고 주차장으로 변했다.
일본군 성노예 조선 위안부
조선소녀들은 일본인들은 샌닌바리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조선 소녀들을 유혹해 암바라와로 끌고 왔다. 23명의 소녀들은 1942년 8월18일 1.408의 조선 포로감시원과 함께 딴중쁘리옥 항구에 도착 암바라와로 끌려와 노예생활을 했다.
3년 동안 3명이 죽고 1945년 8월17일 해방되던 날 일보군은 위안부 증거를 없애려고 한명씩 반공호에 넣어 죽이려 했으나 성밖을 드나드는 세탁공 밀서를 전해받은 연한군에 의해 7명이 살아나왔다. 하지만 해방을 맞았지만 한인들에게 화냥년 대접을 받으며 이방 땅 어느 하늘 아래서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갔다.
적도의 위안부는 생존해서 귀향해서 증언을 남기고 간 고 정서운(2004년 작고) 할머니의 육성을 토대로 2014년 한인포스트 정선대표가 암바라와 현장을 취재해 2015년 광복 70년 특집으로 YTN에 방송되어 역사 속에 살아질 뻔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났다.
인도네시아 한인 아픈 역사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을 앞지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오면서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인니 한인들조차 이 역사를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가 없다” 단재 신채호는 말한다. 역사는 감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본다고 기자는 말하고 싶다.
인도네시아는 스마랑의 라우세웅 꼬따 라마등 식민지의 흔적을 복원하여 기억하고 있다. 자카르타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반일 감정에 조선 총독부를 폭파했다. 역사를 잊고 싶은 것이다.
미래가 없다.
감성의 반일이 아니라 이성의 항일이다.
태평양의 전쟁의 상흔은 우리 민족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