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 김영율

사람의 가치는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바뀐다. 국제시장에서 품질로 맞서 싸워 바이어들에게 최고평가를 받고, 모든 사원들에게는 부모님도 쉽게챙길 수 없는 환경인데도 매주 생일케이크까지 챙겨주는 자애스런 모습을 보이는 이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고평가를 받을 것이다.

2016 자랑스런 한국인 한민족 동포대상은 7백20만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바른 국가관과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고 국가브랜드 가치를 선양하고 재외동포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분을 한국 신문기자 연합회에서 소정의 과정을 거쳐 매년시상하고 있다. 해외 각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기업을 이끌며 세계 속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세우고 있는 기업인들에게 그 공로를 인정하여 주어진다.

가발계의 정주영이라고 불리는 성창 인도네시아 대표이사 김영율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독자들이 가슴 속에 품은 뜨거운 정열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가발은 팔린다
김영율 대표의 가발 공장은 현재 1만 5천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소탈해보이는 간편복 차림을 한 김영율 성창인도네시아 대표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가발 수요는 계속될 것”이라며 “세계적으로 탈모로 인한 가발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미용 목적의 가발 시장이 커지고 있다”며 자신의 사업에 대해서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성창은 현재 인도네시아를 넘어 세계 정상의 자리에 앉은 가발제조업체이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 가발산업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에 이미 가발디자이너로써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영율 대표의 목표는 그보다 더 먼 곳에 있었다. 1980년대에 기반이 잡히자 직접 가발회사를 설립한 김 대표는 가발산업이 쇠퇴하는 1990년대를 기해, 중국이나 베트남보다는 인도네시아의 경영여건이 낫다는 판단 하에 인도네시아로 이주해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 끝에 현재 김 대표는 연매출 8,500만 달러 규모의 거국적인 가발회사 대표가 되었다.

현재 성창은 공장을 여덟 개 운영하고 있다. 매 3년마다 한 공장씩 증설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1억 달러를 수출할 계획으로 신제품 개발에도 총력을 쏟고 있다. 매년 30-40%의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성창은 지금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가발공장이다.

김 대표가 노리는 최고목표점은 역시 세계시장이다.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지고 현재를 발판 삼아 내딛지 못하면 더 큰 성장도 없는 것이다. 더 크게, 더 강하게.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 욕구일 것이다. 김 대표의 눈에는 특히 미국시장이 들어온다.

물론 성창가발 제품의 99프로는 미국시장에 나가고 있다.

속칭 흑인이라고 불리는 아프리칸들은 남녀 모두 심한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냥 놔두면 돌돌 말리거나 심한 경우 두피를 파고 들어 고통을 주기까지 한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매우 얇아 펴려고 하면 끊어진다. 그런 아프리칸들이 선택하는 것이 가발이다.

민머리라는 선택도 가능하지만 더 아름답고 멋지게 꾸미기 위해선 가발은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그들에게 가발은 단순한 치장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발은 신의 선물이자 생필품이다. 미국의 영부인 미셸 오바마나 가수 비욘세도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성창은 전체가발, 반가발, 헤어피스, 익스텐션, 흑인ㆍ백인가발 등 다양한 가발을 생산해 미국과 아프리카를 포함해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중부자바 뿌르발링가에 본공장이 있고, 족자카르타, 보보사리, 시다르자, 반자르 등 주변지역에 8개의 자공장을 두고 있다. 총 17,000명의 인원을 고용하고 있다.

최근 그의 성창에서 내놓은 획기적인 제품이 바로 레이스 프론트 가발이다. 가발 가격은 7에서 8달러 정도에 불과했지만 레이스 프론트는 30달러 수준인데도 시장에서 공급이 모자랄 정도로 열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김 대표는 이 제품이 가발 40년의 역사를 뒤집어버린 제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김 대표의 가발이 잘 팔리는 이유는 뻔한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품질문제로 귀결된다. 최고품질의 원사를 제조업체로부터 확보하고, 고품질의 양품이 만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폐기하는 것이 성창의 가발품질의 근원이다. 누가 보더라도 뛰어난 품질은 당연히 영업에도 직결된다. 자잘한 눈속임이나 싼 가격만으로는 승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구매하는 이들이 사는 지역과 기후에 따라 다양한 맞춤형 가발을 개발하는 것도 잊을 수 없다. 끊임없는 신제품 연구 및 성장동력 개발, 이것들을 포기한 회사에게 미래가 있을까?
또한 전문경영인이라고 불리는 컨설턴트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것도 비결이라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김 대표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현장만큼은 CEO가 지휘해야 한다는 것이 김 대표의 철학이다.

세계금융위기가 오기 전만 해도 한국에서 몇 천, 몇 만명 씩 데리고 일하던 기업들이 현재 천 명, 이천 명 정도 규모로 쪼그라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김 대표와 달리 그들은 성장을 못한 것이다.

서울통상과의 인연으로
가발사업을 시작하다
김 대표가 가발을 진로로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결심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계속 공부할 것인지 기술을 배울 것인지 선택하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한 달을 고민하다가 기술을 배우기로 결정한 김 대표였다.

아버지 소개로 서울통상(현재 서통)에 들어가 견습생으로 들어간 것이 처음이었다. 가발회사 견습생으로 들어가 방과 후에 기술을 배웠고 고등학교 졸업 후 정식직원이 되었다. 그의 열의와 열정에는 주변에서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어서 남들이 일당 2만원을 받을 때 그는 유독 3만원, 4만원을 받았다.

주변에서 “너는 어떻게 그렇게 사장님의 신임을 받느냐” 물어도 김 대표는 미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 그의 전부였으니까.

이후 1986년에 독립해 아내와 함께 일하면서 회사를 키웠다. 아내가 김 대표가 신경쓰지 못하는 곳을 남몰래 신경 써주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지금도 늘 기도로 김 대표의 성공을 빌어주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김 대표와 성창이 있었다고 김 대표는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그때와는 시대가 달라져서 일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가발공장에 잘 오려고 하지 않고, 혹여 오더라도 오래 근무하지 못한다. 결국 가족기업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이다보니 회사에 대한 열정도 가족이 일반직원보다 크다.

삼남매가 현재 모두 모두 직간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창업 초기에는 아내가 참여했고, 지금은 두 아들이 각각 해외영업과 생산 제품분야에서 전문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딸 부부는 인도네시아 내수시장 진출을 시도하고 있고 장남인 김창근 상무는 하이닉스 반도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고도, 미래를 고려해 성창에 자리를 잡았다. 차남인 김대근 이사는 좀 더 현실적이어서 가발산업의 가능성, 다른 기업에 취업했을 경우 권한과 보수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더니 아버지 일을 돕고 배우겠다고 했다.

주문이 밀려서 일손도 모자라던 시절, 김 대표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동원해가면서 용돈을 주고 일을 해야만 했었다. 당연히 여행은 꿈도 못 꾸고 살았다. 아버지가 성공모델이라는 김대근 이사는 “어릴 때는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크게 불만도 없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정작 문제는 사원들이었다. 한국인 직원들은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장기간 근무하려고도 하지 않아서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른 기업과 비교해서 조건이 조금 나쁘거나 회사에 불편한 일이 생기면 극복하려 하지 않고 바로 이직을 해버린다. 이런 행태를 보여서야 어떻게 전문성을 키울 수 있겠느냐며 젊은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토로했다.

일을 즐겨라
김 대표가 47년 간이나 가발외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즐거움이었다.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공자는 자신의 저서 <논어>의 옹야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결국은 즐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세계최고의 가발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하나 성과가 생기고, 그 성과를 주변에서 인정 받을 때가 되자 일 자체가 재밌어지는 일이 생겼다.

김 대표는 지금도 현장이 즐겁다고 말한다. 한때는 ‘나는 가발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린 김 대표는 그때나 지금이나 머리 속에는 가발을 이렇게 저렇게 해봐야지 하는 생각에 가득 차 있다며 한국에서 습득한 최고의 기술과 경영 노하우, 제품 개발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한번 시작한 것은 끝내겠다는 끈기와 승부욕, 안정적인 가정 등이 지금의 나와 성창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카리스마 호랑이
김 대표가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것도 1993년이니 올해 24년 째이다.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어였다. 다행히 통역을 해줄 사람이 존재했고, 밤에 집에 들어가 언어공부를 하는 것으로 극복해낼 수 있었다.

김 대표는 현재 한국인 직원을 30명 정도 쓰고 있다. 주변에서는 왜 그렇게 많이 쓰냐면서 의아스러운 눈치를 보인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직원을 현지인으로 바꿔나가는 일이 평범하다.

하지만 김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사업의 기본은 사원들과 더불어나가는 것이다.

막말로 서울에서 퇴직한 50대 이상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인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작은 기회를 주는 것이 그리 힘든 일도 아니니 김 대표는 모두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가능하면 모두를 이끌고 동거동락하겠다는 것이 김 대표의 생각이다.

김 대표는 “기업은 지역사회와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김 대표는 봉사활동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올 5월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의 스마트 도서관 건립과 후학양성을 위해 미화 1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당시 김 대표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이 돼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부를 하게 됐다”고 말해 자신의 선행에 겸양을 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그 지론은 변하질 않아서, 독거 노인 지원·고아원 지원·저소득층 학생 장학금 지원·직원 주택 보수 비용 지원·지방정부 사업·지역문화행사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빈민가 보수를 위해서 인니화패 3억 루피아를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공장 설립 직후 2년 간은 모든 사원들의 집에 방문한 바 있고, 지금도 사원 중 생일이 있는 사원에게는 생일케이크를 선물하는 등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성창은 현재 전 직원이 17,000여명이나 된다.

사원들이 모임을 가진다고 하면 한국 인스턴트 라면을 각각 10봉 씩 지원해준다.

지난 번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도, 평소에 지원을 해둔 것이 효과를 보였다. 사측에서는 생산성을 높이자는 당연한 주장을 했는데 사원들이 들고 일어나 의견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사람들 특유의 어조도 조금 문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어는 타국어에 비해서 꼭 싸우는 것처럼 들린다는 평이 많다.

당시 일어난 노사분규로 사원들의 파업이 일어나자 김 대표는 파업자들 앞에 나가 “너희 부모도 안 주는 생일 케이크를 주는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만약 문제가 있다면 사전에 나를 찾아와 얘기를 해야지 이렇게 파업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이 시간부로 생일자에게 지급하는 생일케이크를 지급하지 않겠다.”

이 한 마디로 노사분규는 정리되었다. 물론 사원들이 고작 생일케이크 하나 때문에 노사분규를 포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다가왔던 김 대표가 생일케이크를 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나타내는 표상이었기에 노사분규를 멈춘 것이다. 그만큼 회사에서 김 대표의 카리스마는 명성 높다. 문제는 잘 해결되어 이제는 매달 노조대표와 함께 노사협의를 한다.

항상 소통으로 더불어 함께 성장한다는 김 대표의 신념이 직원들의 마음에, 조금씩 사랑으로 스며들고 있다.

성공요인은 제품개발과
품질 단가에…
수십 년이나 회사를 운영하면서 여러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신제품 개발과 열정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운도 따라주어서 1990년대 말 아시아 경제 위기 때는 환율의 혜택도 보았다. 인도네시아 이주 초기에는 시행착오를 겪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귀중한 수업료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문제점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았다. 어떤 경우에도 품질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납기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바이어들의 신뢰를 얻었다.

품질을 우선시하는 김 대표에 관한 일화라면 세계금융위기 당시의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당시 거래회사였던 일본회사가 미국회사로 팔리게 되었다.

수인계 과정이 오래 걸려 해마다 주문물량이 줄어들어 점점 힘들어지는 와중에도 제품 품질이 워낙 뛰어나 오히려 새 회사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백만 달러 정도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돈은 불경기 때 번다는 말이 꼭 맞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회사를 운영할 때만 해도 원가가 굉장히 높았는데, 인도네시아인들은 일에 쉽게 적응했다. 현재의 성창은 정교한 그들의 솜씨에 힘입은 것이 크다.

제품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품질이라면 마케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판매가다. 아무리 품질이 좋고 생산량이 확보되어도 판매가가 안 맞으면 팔 수가 없다. 고작 1,2 달러 차이에 도태되는 것이 가발 시장이다
비수기라는 것은 관료들이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다. 가발은 사시사철 꾸준히 팔리는 제품이다.

앞으로 10년
김 대표의 나이가 올해로 예순다섯이다. 김 대표는 앞으로 10년 뒤에 은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75세가 되면 장남인 김 상무에 대표이사 자리부터 물려줄 생각이다.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한 계획도 전부 구상해뒀다. 서울에 있는 건물 두 채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검소하게 살아갈 생각이다.

기자 역시 김 대표의 평온한 노후생활을 빌어주고 싶지만 은퇴라고 해도 10년이나 남아 있다.

인생은 70부터 라는 속담이 있듯이 김 대표의 뜨거운 열정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성창의 밝은 미래를 가져오길 기대해 보면서, 김 대표의 건강과 성창의 모든 임직원들에게 행운이 함게 하길 빈다.

<기사 발췌. 시사뉴스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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