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년 반 만에 기준금리 동결…물가안정 대책 더 중요해졌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3일 오전 9시부터 열린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서 현재 연 3.50%인 기준금리를 조정 없이 동결했다. 이로써 미국과 격차는 1.25%포인트(p)로 유지됐다. 이달 초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미국은 다음달에도 같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기준금리 인상 행진이 멈췄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3일 기준금리를 현재의 3.50%로 동결했다. 기준금리는 2021년 8월부터 지난달까지 1년 5개월 동안 일곱 차례 연속 올랐다. 한은의 이번 결정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경기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최근 한국 경제가 둔화 국면에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7일 발표한 ‘최근 경제동향 2월호’에서 “물가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이어가는 가운데 내수 회복 속도가 완만해지고 수출 부진 및 기업 심리 위축이 지속되는 등 경기 흐름이 둔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은이 금리 인상 기조를 완전히 접을지는 미지수다. 물가 불안이 이어지는 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Fed)가 수개월 내 최소한 두 차례의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과 미국 간 기준금리 격차는 1.25%포인트인데 이게 더 벌어지면 외국인 자금 유출과 원화 절하가 가속해 경제 전체에 큰 부담을 줄 공산이 크다. 이에 따라 한은은 물가와 경기 흐름을 좀 더 지켜본 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이번 동결을 긴축이 끝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은이 물가 상승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에서도 금리를 동결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이 나쁘다는 뜻이다. 경기 침체의 신호는 통계로도 확인되고 있다.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난해 4분기 -0.4%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한은도 이날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1.7%에서 1.6%로 하향 조정했다. 1%대 성장률은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2020년(-0.7%),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0.8%)을 제외하면 2000년대 들어 가장 낮은 수준이다.

성장 둔화의 결정적 원인은 수출 감소와 내수 부진이다. 수출은 5개월째 뒷걸음질이고, 무역수지는 11개월째 적자이다. 연초부터 지난 20일까지 51일간의 무역적자만 186억 달러로, 사상 최대였던 지난해 무역적자의 40%에 육박할 정도이다.

이달 반도체 수출은 44%, 대중 수출은 23%가량 급감했다.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인 수출이 차갑게 식고 물가까지 급등하자 내수도 빠르게 움츠러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가 이미 약한 강도의 스태그플레이션에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마이너스 성장 속에 물가가 10% 넘게 오른 1970년대 오일 쇼크 때보다는 덜하지만 경기는 가라앉는데 오히려 물가는 오르는 불편한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물가를 잡자니 경기가 걱정이고, 경기를 끌어 올리자니 물가가 걱정인 진퇴양난의 형국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통화 정책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도 이상하지 않다. 정부가 경기 둔화를 공식 인정한 마당에 금리 인상으로 경기 회복 노력에 찬물을 끼얹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행법 제1조는 한은의 존재 이유로 물가 안정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제4조는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이 정부의 경제정책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물가안정을 해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보다 5.2% 올라 3개월 만에 다시 상승 폭이 확대됐다. 작년 5월 이후 9개월째 5% 이상의 고공 행진이다. 한은은 이날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3.5%로 제시했는데 그대로 현실화한다 해도 물가안정 목표인 2%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다. 이번에 숨 고르기를 한 만큼 상황을 면밀히 관찰·분석하고 그 결과에 따라 방향 재조정을 고려해야 한다. 경기에 방점을 둔 한은의 이번 결정에 부응해 정부도 나서야 한다.

한쪽에서는 금리를 올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인플레이션 심리를 자극하는 엇박자가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가가 올라 국민들의 지갑이 얇아지면 경기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상한 대응이 필요하다.

정부와 한은은 적어도 잠재성장률(2%대) 정도의 성장은 달성하면서 동시에 물가도 잡겠다는 확고한 목표하에 머리를 맞대길 바란다. 어려운 과제라는 것은 알지만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고 최선을 다한다면 이번 위기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c)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