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독립청년당과 암바라와 의거지서 “대한독립만세”
☆ “암바라와 성노예 현장을 커피 마시는 장소로 개조”
재인도네시아한인회 임원과 한인학생들이 지난 8월 27일, 28일 중부자와 스마랑 근교 암바라와에 있는 뼈아픈 한인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재인도네시아 한인들에게 아픈 한인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 것은 2014년 9월 한인포스트(대표 정선)가 암바라와 성노예 위안부 수용소를 YTN에 보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한반도가 인도네시아와 교류는 고려인들이 자바섬과 인삼무역을 하면서다. 교류의 근거는 태조와 태종실록에 마자파힛 왕국의 화교 상인 진언상이 조선에 와 태조왕을 만나고 벼슬까지 받은 것이었다.
인삼상인들이 무역풍을 타고 발리 쿠다 안야르, 족자 빠랑 뜨리띠스, 수라바야항까지 무역하면서 얻은 정보가 항일 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장윤원이 일본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일본은행에 근무할 때 독립자금을 빼돌려 지원하다가 발각되자 북경을 거쳐 1920년 9월 20일 자바땅으로 왔다. 이후 화교부인과 첫 다문화 가정을 이루면서 한인 진출 역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22년 후인 1942년 9월 14일 연합군 포로 감시원 3,016명과 위안부 150명이 끌려오면서 한인 역사는 뼈아픈 역사로 돌변했다.
김구의 영향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활(본명 이억관)이 포로감시원으로 오게 되고 항일 독립역사가 일어난다.
일본군의 제2분견소 스마랑 수모워노 연병장에서 항일 혈맹 조직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하게 된다. 1945년 1월 4일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 열사가 “암바라와 의거”를 일으켜 일본군 12명을 사살한다.
네덜란드 전쟁 역사 박물관 NIOD에 기록이 되었지만 2000년대에 밝혀져 고려독립청년당 열사 12명이 독립 유공자로 서훈되어 보훈처에 기록되었다.
* 감춰진 역사… 신문 기사로 알려져
2019년 2월 19일 이태복 사산자바 연구원장에 의해 역사적 현장이 최초로 한인사회에 밝혀지고 2019년 삼일절에 특집으로 한인포스트 4면 전면 보도 된다.
그해 8월 광복절에 한국일보 고찬유 특파원이 4회 특집 보도로 다루면서 기자상을 받고, 연합뉴스 성혜미 기자까지 보도하면서 본격적으로 동포 사회와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태복 작가가 5년 동안 쓴 르뽀소설 “암바라와”를 한국과 인도네시아에 출간하여 하면서 2023년 한-인니 수교 50주년에 서경덕 교수가 KEB의 후원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다.
2017년부터 이태복 사산자바문화원 원장은 인니한인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시산맥, 가온문학, 대경작가회의 등 수많은 문인들을 암바라와의 역사 현장에 초청했다.
* 암바라와 성노예 현장을 커피 마시는 장소로 개조
2024년 한인회 역사탐방은 재외 한인 학생들의 역사 소양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게 되었고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자취를 밟는 기회가 됐다.
선조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찾아 기리는 기회다.
이번에 방문한 JIKS(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학생들과 타 국제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선정된 25명과 박재한 한인회장, 손한평 수석부회장, 역사의 현장 보존을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있는 중부자바 한인회 채환 회장을 비롯 대사관 류완수 영사, 교육의 현장 지도자 JIKS 박은주, 김진혁 교사, 사산자비문화원 이태복 원장, 문인협회 김주명 사무국장 및 한인회 사무국을 포함 총35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위대한 한인들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위대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기회가 됐다.
1942년 9월 14일 자카르타 딴중쁘리옥 항에 도착한 조선인 포로감시원과 위안부가 고난과 고통이 고스란히 암바라와 역사지에 묻혀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인도네시아가 사적지를 개발하면서 역사를 무시한 채 건물을 마구 헐고 암바라와 위안소 현장은 사라지고 있다. 옛 모습의 처연함을 담지 않은 관광지로 탈바꿈 시키고 있다.
이에 한인포스트 정선 대표는 “암바라와 성노예 현장을 커피 마시는 장소처럼 휴기소로 개조되고 있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후손들이 무색하기 그지없다”고 울분을 토했다.
한인들이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적 현장의 복원을 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나마 이태복 시인이 그간 역사적 진실의 자료를 확보해 두고 소설로 현장을 그려 두어서 다행이다.
한인회 암바라와 탐방티은 암바라와 성노예 현장을 공사중인 현장측과 조율 합의해 허락된 소수를 제외한 탐방대원만 입장이 가능했다.
사산자바문화원(이태복 원장)과 중부자바한인회(채환 회장)의 노력으로 암바라와성 입구에 세워질 태평양전쟁 피해자 추모비는 벌써 작년에 제작되고 준비되어 관계기관과 접촉중이다.
암바라와 항일의거지(민영학, 손양섭, 노병한의 자결지)를 거쳐 철도박물관, 성요셉 성당의 일본군의 연합국 국민 억류소, 무기고를 방문하였다.
원형이 살아있는 수모워노 고려독립청년당 결성지 현장에서 탐방단의 목소리로 결기가 넘치는 청년당의 강령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둘째 날에는 스마랑 대표 관광명소인 라왕 세우(천개의 문)에 들렀다. 라왕 세우는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1904-1907년에 건설되었고, 1942년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철도회사의 본부이며 1945년 10월 14일 인도네시아의 독립이 선언될 때 민병대와 ‘스마랑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희생된 곳이다.
철도청년단(AMKA, Angkatan Muda Kereta Api)과 일본군 5일 전투로 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귀신 출연 영화 촬영 세트장이 됐다. 지금은 철도 역사박물관과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고 천개의 문이란 자바어로 이름붙은 이곳은 약 600여개의 문으로 실내의 연결성과 규모에서 그 당시 철도회사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탐방대원인 홍보배(JIKS 10)학생은 “고려독립청년당 결성지가 가장 인상 깊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곳 인도네시아 수모워노에 독립을 위한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머나먼 외지에서 항일독립투쟁의 흔적을 좇고 그분들을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 선열들의 감사함과 경외감이 느껴졌다”고 소감을 말했다.
스마랑 수모워노 고려독립청년당 결성지는 한인의 정체성이고 암바라와 의거는 위대한 역사다.
암바라성 앞에 있는 조선 위안부 수용소에서 하루에 30~50명씩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던 소녀들은 어찌 할 것인가? 얼마나 한인진출의 진실을 알고 있는가?
하루에 열명씩 연합군 포로들이 죽어 시체 산이 되어 갔던 현장에서 일본군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했던 조선 포로 감시원의 비참한 진실을 아직까지 쓰지 못하고 있다.
<글. 이태복 사산자바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