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새해 권두언
2020년 붉은 해가 남방 땅 인도네시아에 떠올랐다. 재외동포 국가 가운데 인도네시아도 올해로 한인이주 100주년을 맞는다. 우리도 지난 100년의 기억을 더듬고 새로운 100년을 시작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인도네시아 한인동포의 과거 100년을 기억하고 현재를 성찰하여 미래 100년을 준비할 시점에 와 있다.
지난 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다. 이제 우리는 인도네시아 이주 100년에 걸맞은 성숙한 대한민국 한인 동포사회를 위해 우리 동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100주년을 펼쳐놓아야 한다.
한인포스트는 지난 2016년부터 독립운동 망명가 장윤원 선생을 한인 디아스포라 첫 주자로 선정하고 100주년을 준비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해 왔다. 그는 큰 사업가나 유명 인사가 아니기에 겉으로 드러낼만한 건물이나 투옥 등 확인서류 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장 선생과 가족이 남긴 나라와 동포를 위한 헌신은 첫 인도네시아 한인 디아스포라로 선정받기에 지나침이 없다.
1920년 9월 20일 독립운동 망명가 장윤원 선생은 바타비야(자카르타 옛 이름) 항구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동경제대를 나와 은행에 근무하면서 독립군 군자금을 지원하다가 일본순사에 쫓겨 상해 북경을 거쳐 화란 바타비야 정부에서 일본담당관으로 일하게 된다.
20년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까지 침략하자 장윤원 선생은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고문당하게 된다. 김문환 씨에 따르면 “제16군 사령부 헌병대에 끌러가 쇠몽둥이로 매질을 당하고 헌병대 건너편에 있는 경찰서 유치장에 3-4일 구금되었다가 인근에 있는 글로독(Glodok) 형무소로 보내졌다”고 전했다.
1945년 일본군이 폐망하자 일본군속으로 끌러온 조선한인 구명운동에 나섰다. 장윤원 선생은 인도네시아 첫 한인회 ‘재자바조선인민회’를 창립하고 바타비야 반둥 스마랑 지부를 세워 2000여명의 조선한인 본국 귀환을 도왔다.
하지만 장윤원 선생은 일본군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 3년만에 숨을 거둬 자카르타에 묻히게 된다. 그의 자녀 가운데 장순일 차남은 네덜란드 유학이후 자카르타 중심가에 있는 카톨릭 ATMA JAYA대학 설립자가 되었고, 장평화 여사는 UI 영문과를 졸업하고 초기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다 여한종 서기관과 결혼하여 초기 한인정착을 도왔다.
인도네시아 한인동포는 인도네시아 국가이념인 빤짜실라 (Pancasila) 와 비네까 뚱갈 이까 (Bhineka Tunggal Ika)를 존중한다. 다문화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다양성의 일원화는 글로벌 시대에 배워야할 이념이다. 한 (韓) 민족의 홍익인간 (弘益人間) 이념처럼 인간존중을 통한 다양성의 일원화로 외국인 커뮤니티를 맞이하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ASEAN 시대에 인도네시아는 한국 청년 차세대의 장(場)으로 펼쳐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이주 100년을 맞는 대망의 2020년. 강점과 분단을 딛고 세계 속에 한인사회를 견인해 온 선배 세대에겐 회한과 감회의 100년 해이다. 이제 우리들이 후손들에게 ‘다른 100년을 위한, 다음 100년’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인도네시아 한인 100주년 기념관’은 차세대에게는 정체성을 재고시켜 주고 인도네시아 국민에게는 함께 피를 나눈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의 형제로, 한인 역사의 의의를 일깨워 주어 화합과 상생의 활로를 함께 고민하는 공감의 터전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100년 후에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인건비에 치중한 수출 제조업중심으로 한인기업은 어떻게 전환되었을까? 100년 이후를 맞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청사진 로드맵은 어디엔가 준비되어야 되어야 한다. 그곳이 100주년 기념관이다.
한인동포 사회에 드려진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자. 한인 1, 2 세대들이 일구어 놓은 터전을 바탕으로 차세대들이 뿌리를 내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100년 장터를 만들어 주자.
<한인포스트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