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1일은 수하르토 대통령 하야 20주년

32년간 인도네시아 철권통치...여론조사 경제여건 하락 민주주의 상승

인도네시아 독재자 수하르토 대통령이 집권 32년만에 지난 1998년 5월 21일 하야를 선언했다.<사진참조> 그는 한때 7%대의 경제성장으로 국민의 추앙도 받았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군권을 장악한 뒤 1967년 와병 중이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을 압박해 정권을 이양받는 방식으로 집권, 인도네시아를 신흥 공업국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다 1997년 7월 루피아화 폭락과 물가폭등 등 경제위기 속에 1998년 3월에 대통령에 7번째 임명되자 재야세력과 학생들의 시위로 5월 21일 하야했다.

네덜란드 통치기였던 1921년 자바섬 중부 욕야카르타에서 태어난 그는 식민지군에 입대, 부사관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일본군이 조직한 방위군에 재입대해 장교로 임관했다. 그 뒤엔 45년부터 항일투쟁으로 전향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후 군인으로 복무하다 1965년 9월30일 공산당 1일 쿠데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육군참모차장을 지내며 군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7선 대통령이란 ‘진귀한 기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전임 수카르노 대통령이 제국주의에 맞선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린 반면 그는 친미·반공주의를 앞세운 ‘개발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었다. 민주주의를 희생시켰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그를 ‘동남아판 박정희’에 빗대기도 했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재임 때 친인척들이 재벌 기업을 소유해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등 거대한 경제권력을 구축하면서 큰 폐해를 남겼다.

국제투명성기구는 2004년 수하르토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그가 재임 때 국고에서 빼돌린 금액이 150억∼350억달러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인도네시아 검찰은 그가 재직시 횡령한 자선단체 기금과 손실금 등 15억 4000만달러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선에서 2006년 5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수하르토는 하야 뒤 법의 처벌을 받지도 않고,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 또 대통령 재임 때의 각료들 중 상당수가 새 정부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수실로 유도요노 대통령 시절인 2008년 1월 27일 향년 86세에 서거한 수하르토 대통령에 대해 정부는 1주일간 전국에 조기를 게양하며 국민들은 애도했다. 인도네시아 공군은 수하르토의 시신과 가족 및 조문객을 장지(葬地)인 자바섬 중부의 솔로 시내로 수송하기 위해 제트 여객기 2대와 수송기 5대를 공항에 대기시키기도 했다.

2006년 5월 여론조사기관 ‘서베이 인도네시아’가 수하르토 퇴진 8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인도네시아 국민 상당수가 수하르토 정권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의 집권기간 치적에 대해 63.9%가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응답했으며 ‘수하르토 정권 때 경제상황이 재임 전후에 비해 좋았다.’는 국민은 무려 69.6%나 됐다.

2018년 5월 21일 Indo Barometer 여론조사기관은 하야 20주년에 설문조사에서 민주주의는 과거보다 79.4% 향상되었다며 발표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지도자를 선택하는 자유, 언론의 자유와 보장에 국민들이 동의했다.

하지만 경제분야에서는 응답자 54.6%가 수하르토 (Soeharto) 대통령 정부시절이 경제적 여건이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고, 24.6%는 하야이후 개혁시대가 더 좋았다고 선택해, 수하르토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깊게 내재되어 있다는 걸로 나타났다.
<기사 서울신문. 비즈니스인도네시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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