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11월 10일 영웅의 날… 외로운 양칠성 영웅묘지

지난 11월 10일은 인도네시아 영웅의 날이었다. 이날은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선언을 한 후 수라바야에서 영국군과 네덜란드 군의 공격에 저항하는 전쟁을 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이 수라바야 전투는 1945년 10월 27일부터 11월 20일까지 계속되었고 인도네시아군은 탱크, 전투기, 군함 등을 내세운 영국군에 맞서 싸워 네덜란드, 영국군 200명을 사살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15,000명 군인이 사망했고, 200,000여명의 수라바야 시민들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이에 당시 수라바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인도네시아 인들을 기리기 위해 인도네시아는 11월 10일을 ‘영웅의 날’로 기념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 양칠성 영웅을 잊을 수 없다. 양칠성 독립운동가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으며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바다를 건너 스마랑에 주둔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다.
이후 조선은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청년은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에 가담해 싸우다 잡혀 1949년 총살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26년 뒤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인정받아 자와 가룻지방에 있는 국립영웅묘지에 묻혔다. 그의 이름은 양칠성이다. 양칠성은 1919년 전북 완주군에서 태어났으며 인도네시아로 간 것은 1942년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여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기도 했다.

1942년 3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는 350년 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일본이 패전하자 네덜란드는 일본에 빼앗겼던 식민지를 되찾으려 했다. 양칠성은 게릴라 부대 팡에란 바팍(왕자부대)을 이끌고 싸웠고, 1948년 네덜란드 군에 체포돼 이듬해 8월 총살됐다.

양칠성은 원래 공동묘지에 묻혀 있었으나 함께 투쟁했던 인도네시아 부하들이 장군이 되면서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탄원을 보내 그를 독립영웅으로 인정했고, 1975년 그의 유해를 가롯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양칠성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1970년대 인도네시아에서다. 무라이 교수는 일본인 3명이 현지에서 독립영웅으로 추대된 1975년 당시 일본어 통역을 맡고 있었다.

무라이 교수는 그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한 일본인의 행적에 관심을 갖고 조사에 나서 그가 사실은 양칠성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라이 교수는 아내 우쓰미 교수와 함께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자바 수용소 포로감시원 출신 조선인 단체와 양칠성의 유족 등을 찾아 다니며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이후 묘지 비석에 일본 이름이나 인도네시아 이름이 아닌 양칠성의 본명이 새겨진 것은 1995년의 일이다.
1995년 한국시민단체는 양칠성 국적이름 찾아주기 시민운동본부를 만들어, 인도네시아독립50주년인 1995년 8월19일 외무부 훈령으로 양칠성이란 이름으로 묘비제막식을 하게 된다.

가룻영웅묘지에 안장된 한국인 1세 양칠성 독립운동가의 묘지가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유일한 혈육인 장남 에디켐베이씨를 돌보는 이가 없고 그 후손이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아는 이가 없어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한인 1세의 역사를 버려서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