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선생 유택’. 주소를 들고 찾아간 지중해상의 스페인 마요르카 섬 한 골목에서 이 같은 문패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한글로만 적힌 문패의 ‘유택’이라는 말이 어색했던 탓이다. 안익태 선생이 ‘머물렀다’는 의미에서 아마 ‘유택(留宅)’이라고 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국어사전에 단어를 찾으면, ‘유택(留宅)’은 없다. 대신 ‘유택(幽宅)’이라는 말은 나온다. 무덤이라는 뜻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1946년 스페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이 섬에 정착해 1965년 바르셀로나의 병원에서 간경화로 사망하기까지 19년을 살았다. 선생의 유해는 1977년 한국으로 봉환돼 현재 서울국립현충원 제2유공자 묘역에 안치돼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택보다는 ‘고택(故宅)’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연고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안익태 선생이 살던 집은 스페인 한상 출신인 권영호 회장이 구입해 우리 정부에 기증한 뒤, 안익태 선생의 유자녀인 셋째딸이 살면서 기념관으로 꾸며 관리하고 있다. 이 고택을 찾은 것은 3월22일과 23일이었다. 첫날에는 영국에서 온 김훈 유로저널 발행인, 스위스에서 온 차현숙 유럽총연 자문위원과 함께 찾았다.
휴대폰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해 팔마의 호텔에서부터 걸어서 찾아 갔다. 안선생 고택은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집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으나, 정문에서는 골목 끝으로 높이 솟은 해송들 사이로 아름다운 바다가 조망됐다.
안익태 선생은 1906년 12월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음악을 접했으며, 1918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수업을 받았다. 선교사인 마우리 박사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일본으로 유학을 주선했다. 일본 세이소쿠 중학에서 첼로특기자로 공부한 뒤, 동경국립음악학교에 진학해 첼로 전문연주자의 길을 걷는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국내에 귀국해 음악회를 열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음악원을 거쳐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첼로 수석 주자로 활동했다. 이어 커티스음악원으로 옮겨 작곡과 지휘 공부를 시작한 그는 1930년 ‘애국가’를 작곡했다.
1936년 유럽으로 옮긴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서 지휘를 배웠고, 그의 추천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교향악단 객원 지휘자로 유럽에 데뷔했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안익태 선생을 후원해, 많은 무대에서 지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애국가’ 선율이 들어간 ‘코리아판타지’를 작곡해 초연한 것은 1938년 더블린에서였다.
1944년부터는 마요르카에 정착했고,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으며, 1961년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의장과 면담에서 ‘서울국제음악제’를 제안해 음악제 개최 및 국립교향악단 창설 등에 기여했다.
안익태 선생의 고택의 초인종을 열고 집안을 방문한 것은 이튿날인 23일이었다. 이날 개최된 유럽한인차세대 웅변대회를 끝내고, 만찬을 기다리는 틈을 타서 유제헌 유럽총연 회장, 최영근 사무총장 등 10여명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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