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2주년을 맞아 인도네시아에서 초기 한인들의 조국애와 항일독립운동 실체를 인식하고저 인도네시아 한인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본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곳곳에 남아있는 독립운동 사적지가 이제는 아무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한인진출 100년을 3년 앞둔 한인사회는 97년전 초기 정착 한인의 대한 실태조사도 안보이고 후손에 대하여 관심 갖는 이도 거의 없다. 또한 72년전 독립운동의 현장에는 더 더욱 그렇다. 독립운동을 하다 자결한 곳에는 기념비조차 없고 논밭으로 변해 있으며, 암바라와 성노예위안부 처소를 인니정부는 그대로 남겨두었으나, 이를 보존하려는 움직임도 없다.
한인사회는 인도네시아에서 경제적으로 큰 외국인 커뮤니티만 자랑하고 말고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면서 각종 자료를 요약해 본다. <한인포스트 편집부>
● 재 자바 조선인민회(在爪朝鮮人民會) 바타비아 본부 자리
● 재 자바 억류소 자리
● 글로독 형무소 : 한국인 군속들이 BC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곳.
● 재 자바 조선인민회(在爪朝鮮人民會) 반둥(萬隆), 스마랑 지부
● 스모우노 교육대
● 고려독립 청년당 암바라와 의거 자리
● 손양섭 노병한 민영학 자결자리 : 스마랑 암바라와
● 자피낭형무소
● 가루트(Garut) 영웅묘지 : 양칠성이 묻힌 곳.
● 반둥포로수용소 자리 : 제1분견소의 金萬壽 趙南薰 등이 근무.
■ 수라바야, 한국-인도네시아 평화 기원의 탑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해외최초의 위령탑 건립
2010년 5월 8일(토) 오후 수라바아시에서 2차 세계대전 한국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평화공원이 개막했다.
이날 한국 인도네시아 평화공원에서 열린 대일본항쟁기 희생자를 위한 제막식은, 양국이 일본지배로 피해를 입은 슬픈 역사를 극복하고 한국-인도네시아 우호관계증진 목적으로, 2800제곱미터 규모에 ‘한국-인도네시아 평화공원’으로 이름 지어 ‘평화기원의 탑’을 세웠다.
태평양전쟁 당시 한인들은, 인도네시아 자와 지역에 강제 동원된 군인, 군속, 노무자, 포로감시원 등으로, 인도네시아의 전쟁터, 포로수용소, 병원 등에서 전투와 노역을 하며 약 2,237명은 희생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마련된 ‘한국 인도네시아 공원’은 태평양 전쟁 당시 희생된 동포들의 원혼을 달랠 뿐만 아니라 양국 우호 증진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2010.8.한인포스트 신문기사중에서>
■ 암바라와 의거지 제2분견소
◎ 현주소 : Jl. Mgr. A. Sugiyapranta SJ No. 56, Ambaraw
암바라와 의거를 일으킨 곳이다. 일본군들은 암바라와 제2분견소로 사용되는 성당 뒤편에 가늘고 긴 건물에 네덜란드 부녀자들을 집단으로 억류하여 수용하였다. 이 성당은 1870년에 설립되었다가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포로수용소 제2분견소 및 억류소로 사용하였다.
쟈바지역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에 1944년 4월 일본군은 그때까지 방치해오던 연합국 민간인들을 억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쟈바지역 포로수용소가 그 관리업무를 겸하게 되었다.
즉 쟈바에 있던 연합국 민간인들을 ‘재 자바억류소’라는 곳에 집단 수용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이 네덜란드계 민간인들을 억류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곳에 군인이 아닌 민간인 약 11만명이 수용되었으며, 한국인 감시원들이 배치되어 감시활동을 하였다. 이곳에서 민간인을 관리하던 한인 군속들이 이곳에서 의거를 일으키게 되었다.
현재 성 요셉 천주교 성당Gereja Katorik Santo Yusup으로 사용되고 있다.
■ 고려독립청년당 결성지 스마랑
◎ 현주소 : Bantir-Sumowono, Semarang
1944년 12월 24일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한 곳이다. 스마랑Semarang주 수모워노Sumowono라는 고원지대이다. 원래 이곳은 일본군의 스마랑교육대였으나, 한국인 군속들이 인도네시아인 병보兵補들을 훈련시키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정식 행정명칭은 중부쟈바주Propinsi 스마랑시Kotamadya 수모워노 면Kabupaten이며 서마랑시에서 50~60키로 떨어진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산악지역으로 기온이 낮아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는 이곳에 식민지배자들이 주로 거주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재훈련을 받던 한국인 군속들이 1945년 12월 24일 이곳 교육대 취사장 뒤편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하여 일본군의 패전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현재도 가끔 군부대가 야영훈련에 사용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곳을 깜풍Kampung 마을이라고 부른다.
■ 고려독립청년당 반둥지 구당 쟈바포로수용소 제1분소
◎ 현주소 : Jl. A.H. Nasution No. 114 Kelurahan Sukimiskin Kecamatan Arcamanik, Bandung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 이곳을 ‘하우드만스트 탓’이라고 불렸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면서 이곳을 쟈바포로수용소 제1분소로 사용하였다.
1943년 중반 포로감시원으로 왔던 김만수金萬壽는 반둥에 있는 수카 미스킨Suka Miskin 형무소에서 화란인 포로들을 감시하는 감시원으로 배속되었다.
수카 미스킨은 화란통치시대에 세워진 감옥으로 그들이 세웠던 감옥이었지만 일본이 점령하면서 화란인들이 수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김만수는 화란포로들에 대한 호의가 알려져 화란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수여받았다.
반둥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4개 분견소와 병원이 있었다. 반둥포로수용소 제1분견소에서 근무하던 김만수金萬壽·조남훈趙南薰 등이 간접반항의 본보기로 포로들의 외부연락과 포로의 실력배양에 힘쓴 것은 화란인 칸나벡Kannabeg 백작이 입증하고 있다.
김만수가 소속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위치한 지역의 정확한 명칭은 ‘수까 미스낀Suka Miskin’지역이고, 아직도 그 수용소가 존재한다. 당시 수까미스낀 수용소에서 김만수와 같이 근무했던 한국인 동료로는 유홍배·이병용·최모씨 3명이 있었고 한다.
전북 군산 출신의 김만수씨는 화교계와 결혼하여 자카르타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1966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수교에도 일익을 담당할 만큼 초창기 이곳 교민사회 형성에 공헌을 하였다.
현재 인도네시아 법무부 제1등 형무소Departerme Kehakiman Dan Ham Ri, Lembaga Pemasyorakatan Kelas-!, Sukimiskin, Bandung로 사용되고 있다.
■ 민영학 자결지
◎ 현주소 : Herman 63 Yeareole Bejalen, Ambarawa
1945년 1월 4일 고려독립청년당 당원 손양섭·노병한·민영학은 일본군에 대항하여 의거를 일으켰다. 이들은 제3억류소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항전하였으나, 암바라와 의거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민영학이 일본군에 의해 총상을 입었다.
이들은 암바라와 기차역에 잠시 숨어 있었으나 부상이 심한 민영학은 다른 동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인근 수수밭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고려독립청년당 세마랑지구 책임자 이상문은 종전 후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이 숨진 암바라와에 들어가 3의사의 유해를 봉대하여 왔다.
그리고 1946년 1월 6일, 암바라와 3의사가 순국한 1주기에 고려독립청년당 주관, 재자바조선인민회 후원으로 손양섭·노병한·민영학에 대한 합동 영령제를 거행하였다.
민영학이 자결할 당시에는 수수가 재배되었으며 바로 옆에는 일본군의 야전병원이 있었다. 병원 자리에는 결핵병원이 들어섰고, 농토로 사용하고 있는 민병학의 자결지 앞에는 수디르만 초등학교가 있다.
■ 암바라와 연합군 포로 수용소내 일본군 성노예 위안소
고 정서운 할머니는 일본이 위안부는 없다는 말에 “내가 스마랑에서 위안부였다”고 처음으로 증언했다. 정서운 조선한인여인뿐만 아니라 23명이 일본군 간호원 복장으로 암바라와 연합군 포로수용소까지 끌려와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하다가 많은 사람이 자결하는 등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연합군바타비아(자카르타) 일본군성노예 재판법정기록>연합군 바타비아 재판부는 스마랑 암바라와 연합군 포로수용소 사령관을 성노예 위안소를 운영한 증거로 총살형 판결하고 부대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일본은 위안부를 부정하다가 이 재판법정기록이 밝혀지자 꼬리를 내리고 있다.
■ 인도네시아 최초 한인회, 재자바조선인민회(在爪朝鮮人民會) 창립
인도네시아 최초 한인회 창립 배경은 독립운동하다 적발된 애국지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논의되었고, 한인회는 수감 중인 고려독립청년당 당원들의 인도 문제로 적극 대응했다.
1945년 8월 26일 자바 일본군 군정감부 선전부(부장 허영감독)는 구치 중인 고려독립청년당 당원들의 인도 문제로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를 조직해 구금 중인 당원들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일본 영화 감독이면서 독립운동 후원자인 허영감독은 동맹통신사 최호선(崔浩善), 송병기(宋炳騏), 박승욱(朴承郁) 등과 협의하여 주로 한인 군속들을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최초의 한인회인 ‘재 자바조선인민회(在爪朝鮮人民會)’를 창립하였다.
1945년 9월 5일 허영·송병기·박승욱·최호선 등 조선인민회 간부들이 고려독립청년당 10명의 신병을 인수했다.
고려독립청년당가를 작곡했던 김현재가 조선인민회가를 작곡하고, 한맹순(韓孟淳)이 작사하여 민회가를 부르는 등 귀국 전에 동포들의 단결을 공고히 하였다.
또한 자카르타 중국국민당 알선으로 재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과 연락, 주석으로부터 메시지와 더불어, 태극기를 민회 전면에 매일 게양하였다.
1946년 1월 6일 암바라와 3의사가 순국한 1주기에는 고려독립청년당 주관, 재자바조선인민회 후원으로 손양섭 의사, 노병한 의사, 민영학 의사에 대한 합동 영령제가 거행되기도 하였다.
종전 후 고려독립청년당은 자진 해산하고 인도네시아 현지에 있던 민간인을 포함한 1000여명이 1946년부터 재자바조선인민회로 모여 활동했다. 꼬따 바타비아 지회, 반둥지회, 스마랑 지회로 나누어 한인들의 애환을 나누었다. 자카르타에 있던 조선인민회는 자카르타의 코타 지역에 있던 조선인민회 극장을 중심으로 회합을 가졌다.
■ 중부자와 가룻 국립영웅묘지 양칠성 독립투사
1975년 11월 중부자와에 있는 가릇 영웅묘지에 3인의 일본인이 성대한 의식과 함께 안장됐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다. 이들 3인 가운데 연고가 없는 이상한 ‘인도네시아 이름 코마르딘, 일본 이름 야나가와 시치세이’가 발견되었다.
그의 비석에는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일본식 이름이 새겨졌으나 그는 ‘양칠성’(사진)이라는 한국인이었다. 1919년 전북 완주 삼례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초반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일본 패전 후 35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네덜란드가 다시 점령국으로 등장했다. 양씨는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함께 게릴라 부대 ‘팡에란 파팍’을 이끌며 ‘반둥 불바다 사건’ ‘치바투 철교 폭파’ 등의 공을 세웠고, 그의 부대가 나타나면 반드시 전투에 이긴다고 해서 그는 ‘칼리만탄의 왕’이라 불렸다.
그러나 그는 1948년 11월 부대원들과 함께 서부 자바의 가루트(Garut) 부근 가루아라 산 속에서 게릴라 작전 중 네덜란드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 1949년 8월 자바의 크루콥이란 곳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형을 당하였다. 한국 시민단체와 인도네시아 한인동포들의 노력으로 1995년 양씨의 비석에 ‘양칠성’과 ‘코리아’를 새겨넣을 수 있었다. 사후 46년 만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세 번째 이름인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란 뜻의 ‘코마루딘’도 비석에 함께 새겨져 있다.
■ 글로독 형무소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의 이활, 박창원, 이상문 등 대부분 군속원들로 이루어진 임원들은 전범 재관 과정에서 조직이 많이 와해 된 것으로 보인다.
영국과 네덜란드 등의 연합군이 일본 포로수용소의 군속들을 대상으로 전범 색출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전범으로 몰린 군속들도 있었다. 2년에 걸친 전범 색출 과정이 끝난 1947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들은 다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인 군속들이 B,C급 전범으로 취급해 사형당한 자카르타 근교 글로독 형무소는 1968년부터 폐쇄되어 글로독프라자, 하르꼬프라자, 글로독 자야 건물로 개발되었다. <자료참조.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인도네시아한인개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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