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진출 韓섬유기업 고사위기

한국-베트남 교역

“베트남 믿고 투자한 게 오히려 독이 됐어요. 이대로면 사업 다 망하고 맙니다.”

베트남에 진출한 A 섬유기업 임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A기업만의 일이 아니다.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중소·중견 섬유기업은 약 1000여개사에 이른다. 이들 모두 대혼란에 빠졌다. 코로나19 여파를 가까스로 견뎌냈더니 더 큰 장벽에 부딪혔다.

이유는 베트남 정부의 ‘내국 수출입제도’ 변경 추진 때문이다. 베트남의 외국인 투자 우대 정책으로, 국내 섬유기업들이 대거 베트남을 택한 유인책이었다.

하지만 최근 베트남 정부가 돌연 제도 변경을 추진하면서 벌써부터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더는 베트남에서 버틸 수 없다는 위기감까지 팽배하다.

▶韓 의류산업 메카 ‘베트남’, 내국 수출입제도가 견인

베트남은 국내 섬유산업의 메카로 불린다. 주베트남 한국상공인연합회 및 코트라 등에 따르면,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섬유의류기업은 약 1000여개사로, 베트남의 북·남부지역 등 전 지역에 걸쳐 진출했다. 1968년부터 최근(2020년)까지 국내 섬유의류기업의 국가별 해외투자 누적액으로도 베트남(약 31억 달러)이 1위다. 중국(2위, 약 26억 달러)보다도 많다.

베트남에 국내 섬유기업의 진출·투자가 활발했던 이유론 ‘내국 수출입제도’가 꼽힌다. 내국 수출입제도는 수출품 제작 과정에서 베트남 내 기업 간 거래도 내수가 아닌 ‘수출입’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예를 들어, 국내 기업이 베트남 현지 공장에서 의류를 제작할 때 베트남 내 원부자재업체와 봉제업체 간 물품을 거래하면 이 역시 수출입 거래로 인정, 동일하게 면세 혜택 등을 주는 식이다.

베트남에서 의류를 생산, 국내 마트에 납품하고 있는 B기업 관계자는 “예전엔 베트남 봉제공장에서 쓰는 원부자재를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 많이 가져갔지만, 이젠 베트남 의류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베트남산 원부자재를 많이 공급받는다”며 “이를 기존과 달리 수출입 거래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얼핏 사소해보일 수 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파장은 심각하다. 수출입 거래를 내수 거래로 판단하면 당장 면세 혜택이 사라지고 관세 및 부가세 부담이 따른다. 이는 고스란히 원가에 반영되고 가격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기업 입장에선 굳이 베트남까지 진출한 이유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셈이다.

특히나, 베트남 의류산업의 경쟁력을 믿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기업일수록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다. C기업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선 사활을 걸고 대규모 투자를 택했는데, 이미 투자한 게 있으니 철수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원가 인상을 감내할 재간도 없다”고 토로했다.

▶“경영 예측 제로” 불확실성이 진짜 리스크

진짜 리스크는 따로 있다. 가격 경쟁력 하락 자체보다 더 두려운 건 바로 ‘불확실성’이다. 수출 경영에 있어선 치명적 단점이다.

이미 베트남 산업 현장은 대혼란에 빠지고 있다. 아직 베트남 정부가 제도 변경안을 확정한 단계도 아니지만, 일부 지역에선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등 중앙·지방 간 혼선이 빚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지역이나 기업은 수출입 인정을 못 받는가 하면, 또 어떤 지역·기업은 가능한 식이다. 마치 운에 맡기듯 경영을 해야 하는 셈이다.

일부 기업은 보세창고를 활용하는 방안까지 도입했다. 보세창고는 수입수속이 끝나지 않는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뜻한다.

기존엔 원부자재가 바로 봉제공장으로 갔다면, 이젠 원부자재를 보세창고로 보내고, 보세창고에서 봉제공장으로 보내는 식이다. ‘A(원부자재업체)→B(봉제공장)’의 거래가 ‘A→C(보세창고)→B’의 거래가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세창고 자체가 수출입 물품을 다루는 창고이기 때문에, 여길 거치면 수출입으로 인정받는다. 이를 위해 불필요한 보세창고만 추가됐고, 비용·시간도 늘었다.

업계 관계자는 “수출입을 내수 거래로 바꾸려면 거래 방식이나 납품 대금 구조 등도 모두 바꿔야 하고 생산 체계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며 “당장 비용을 감내하더라도 일단 현 수출입 인정을 유지하려는 울며 겨자먹기식 미봉책”이라고 토로했다.

베트남 진출 韓섬유기업 고사위기-▶“하루하루 피 말린다…기업만으론 해결 불가”

이들 기업은 베트남 정부의 내국 수출입제도 정책 변경 계획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변경되더라도 충분한 보완책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특히 기업들은 국내도 아닌 베트남 현지 상황인 탓에 정부·기관의 대응이 부족하다고 호소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기업들 외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만약 중소기업 중심인 섬유산업이 아니라 베트남 진출 대기업의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미온적으로 나오겠느냐”고 토로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도 이 같은 문제를 인식, 오는 20일 ‘베트남 내국 수출입제도 개정 추진 동향 설명회’를 개최하며 업계 의견 취합 및 대책 논의에 나선다. 섬산련 측은 “현지 공관과 대한상공회의소 등과 긴밀하게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며 “설명회를 통해 회원사들의 우려와 현황 등을 공유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 등을 검토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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