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관련법 개정 두고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이념 대결

인도네시아에서 성폭력 관련법 개정을 두고 사회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란은 지난 11월 12일 교육문화부 장관인 나디엠 마카림(Nadiem Makarim)의 대학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장관령 공표 이후로 본격화됐다.

장관령은 2020년 교육문화부가 실시한 조사에서 대학 교수들의 약 77%가 대학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다고 답변하고, 이들 중 63%는 성폭력 사건을 관련 담당자 혹은 기관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결과에 근거한다.

현재 인도네시아의 성폭력 관련 법은 성폭력에 대해 매우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는데, 교육문화부는 이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이 처벌되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는 언어적, 비물리적, 디지털 성범죄 등 20가지의 성폭력 행위를 구체화하여 대학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장관령을 발표했다.

사실 이전에도 인도네시아에서 관련법의 문제를 지적하며 성폭력 규정을 구체화해야한다는 주장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인도네시아 여성폭력방지위원회(Komnas Perempuan)rk 2012년 관련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치권에서 이러한 요구에 대한 응답은 지지부진했고, 최근 교육문화부 장관령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현재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논의중인 개정안의 내용은 교육문화부 장관령과 궤를 같이한다. 성폭력을 판단하는 기준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사회의 성폭력 근절을 위해 성폭력의 범위를 구체화하자는 논의는 왜 논란이 되었을까? 논란은 성폭력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로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포함하는 것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이와 같은 논란은 보수적인 이슬람 단체(MUI, Muhammadiyah, Majelis Ormas 등)와 정당(PKS, PPP, PAN 등)의 반대로 시작됐다.

이들의 성폭력 관련법 개정과 교육문화부 장관령 반대 논리는 다소 황당하다. 성폭력을 규정하는 기준에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추가하면 합의된 성관계는 합법이 되고 이에 따라 합의된 혼외 성관계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최근 법안 개정 시도는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며 인도네시아 상황에 맞지 않는 서구 자유주의의 모방”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들은 현재 인도네시아 법에서는 혼외 성관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성폭력 관련법 개정은 간통과 혼외 성관계 합법화를 위한 시도라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보수주의적 이슬람 단체와 정당들은 법안 개정에 반대하거나 ‘동의 여부’ 문구를 ‘품위(decency) 유지’라는 문구로 대체하는 ‘중재안’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논란은 법안 자체에 대한 논란이기보다 권위주의 정권의 몰락과 제도적 민주주의 실시 이후(2000년 이후)부터 지속된 이념 대결의 연장선이라고 해석한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이지만, 인도네시아는 세속주의적 정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무슬림 단체를 중심으로 이슬람 율법에 근거한 정치는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이와 같은 보수주의적 이슬람 포퓰리즘은 인도네시아 정치의 주요 국면마다 등장하였고, 이는 자주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 원칙과 충돌했다. 따라서 현대 인도네시아 정치에서는 근본주의적 종교 정치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힘겨운 조정이 존재한다.

특히 1984년생의 나디엠 마카림(Nadiem Makarim)은 인도네시아의 ‘슈퍼앱’인 고젝(Gojek)의 공동 설립자이자 하버드 졸업생으로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30대의 미국 유학생 출신의 장관이 실시한 ‘자유주의적’ 장관령은 보수주의적 이슬람 가치를 수호하는 이들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졌다.

또한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화교이자 개신교 신자인 바수키 차하야 푸르나마(Basuki Tjahaja Purnama)와 자카르타 시장-부시장 러닝메이트 경력으로 인해 그의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 수호는 간혹 의심받아 왔다.

따라서 현재 인도네시아 행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자유주의적’ 법안 개정에 대한 보수주의적 이슬람 세력의 반대는 그동안 느낀 위협에 대한 과장된 반응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법안 개정이 지연되는 동안 인도네시아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받아야 하는 법적 보호 조치 역시 지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의 여성 단체들은 조속한 법안 개정을 촉구하며 “종교에 의해 여성의 신체가 통제당하는 상황을 하루 빨리 멈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도네시아의 해묵은 이념적 대결이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위기의 신체를 두고 벌어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보수주의적 종교 세력의 주장과 위협받는 신체들의 절박한 요구 중 인도네시아 정치권이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는 명백하다.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하는 논란은 낙태죄 폐지 이후 관련법 제정의 지지부진함, 14년의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에 대한 침묵 등의 과제를 갖고 있는 한국 정치권과 오버랩되며 이어질 논쟁과 결과가 주목된다.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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