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00년 독립망명가 장윤원 선생 훈포상 청원을 위한 제언- 빛도 없는 100년전 장윤원 독립운동가와 한인군속의 항일운동

한인100년사 탐방팀은 장윤원 선생 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자카르타 뽄독인다의 따나 쿠시르(Tanah Kusir Cemetery) 묘지에 장윤원 선생 가족 묘소가 있다. 묘비에는 ‘장윤원’이라는 한자와 일본식으로 발음한 ‘조 준 엔(CHO JUN EN)’ 이름과 출생지 ‘서울’이 함께 새겨져 있다. 묘지에는 1984년도에 별세한 부인 황항아와 차녀 장방기가 함께 합장되었다. 사진.한인100년사 탐방

√임시정부수립 100년을 맞아 인도네시아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숨져간 항일 독립운동가를 통해 한인 100주년 의미를 되찾아 동포사회 정체성을 확립

2019년에 3.1운동 100주년과 상해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인도네시아 동포사회 역량을 다시 한번 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남쪽의 끝나라 남방 땅 인도네시아에서 대한독립 운동 관련 자료가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하지만 머나먼 제3국에서 이런 자료를 발굴하고 자료화하는 데는 정부당국도 아니고 당사자 가족 아니면 독립투사 못지않은 거주국 한인동포나 제3국인이 먼저 앞장서 왔다.

인도네시아에서 대한독립운동 역사 발굴도 마찬가지다. 고려독립청년당 역사도 당사자들이 귀환되어 수십년동안 청원과 자료를 제출해 해방된 지 2011년 인정받아 수훈됐다. 한인포스트가 직접 인터뷰한 고 이상문 인도네시아 독립열사는 “보훈대상 지정에는 독립운동 못지않은 수십년동안 보훈처와 외롭고 힘겨운 싸움이었다”고 전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고려독립청년당과 조선한인의 의로운 항거와 죽음도 일본여성작가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현장 탐방기로 ‘赤道下の朝鮮人叛亂(한국어번역본 적도에 묻히다)’로 세상에 드려났다. 우쓰미 아이코 여사의 관련 참고도서만도 100권에 이른다.

고려독립청년당 암바라와의거 독립운동처럼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도 있지만 대부분 독립열사는 소리없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피눈물 흘리며 싸우다 초야에 묻혔다.

이 가운데 인도네시아 한인동포라면 장윤원(張潤遠) 선생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장윤원 선생은 독립운동 열사 가운데 그야말로 초야에 묻힌 무명인사다. 어디 독립운동 기록도 흔적도 없고 훈포장 서훈이나 수상 이력도 없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구름처럼 들풀처럼 대한독립에 소망을 두고 이억만리에서 숨을 다한 조선 한인 한사람에 불과하다.

장윤원 선생은 독립군자금 지원에 적발되어 왜놈 순사 추격을 피해 상해 북경을 거쳐 지인의 소개로 피난처 바타비야(자카르타 옛이름) 화란동인도회사 일명 화란총독부로 1920년 9월 첫발을 내딘다. 2020년이면 100년이 된다.

자카르타에서 재혼한 장윤원 선생의 중국인 부인과 자녀. 사진.인도네시아한인100년편집위
자카르타에서 재혼한 장윤원 선생의 중국인 부인과 자녀. 사진.인도네시아한인100년편집위

이때부터 장윤원 선생의 운명은 나라 잃은 디아스포라의 여한을 품고 조국에 두고 온 가족(처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남방 땅에서 생을 이어간다. 화교여성과 재혼하여 2남3녀를 얻고 화란 총독부 일본국(日本局) 일본어담당 수석고문관(High Commissioner for the Japanese Language, Bureau of Japanese Affairs)의 직책으로 자리를 잡고 산다. 그사이 장선생의 독립자금을 전달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독립운동가로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1942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침략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회오리 친다. 추격자와 도망자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야 한 복판에서 다시 만났다. 일본군 가택급습 체포와 구금 그리고 고문과 폭행은 일본패망까지 3년 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장윤원 선생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나라 잃은 조선군속 본국 귀환을 위해 최초 한인회를 결성하고 일본군이라는 죄명에 억울하게 감옥살이하는 한인군속의 구명운동에 앞장서다 1947년 11월 숨을 거둔다.

이후 가장을 잃은 장윤원 선생의 자녀들은 자립하며 네덜란드 유학과 UI대학을 다녔고, 2남은 대학설립자로 3녀는 한국대사관 직원으로 헌신하게 된다.

'한인진출 100주년을 세우자' 한인포스트 2017년 신년사설
‘한인진출 100주년을 세우자’ 한인포스트 2017년 신년사설

이에 한인포스트는 지난 2016년부터 장윤원 선생 희생과 유가족의 헌신을 귀하게 여겨 한인 1세대로 지명하여 <한인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자>고 처음으로 주장해 왔다. 이에 한국대사관을 비롯한 재인도네시아 한인회 그리고 여러 한인사회가 동참하면서 2020년 한인 100주년 기념사업을 앞두고 있다.

한인포스트는 또 한번 제안한다. 독립망명가 장윤원 선생의 인도네시아의 첫 걸음 100년을 맞이하는 2020년에 훈포상 청원을 제언하고자 한다. 독립망명가 장윤원 선생 훈포상 청원운동에 한인동포사회가 적극 동참해 주길 바라면서 그의 활동 주요내용을 요약해 본다.

√훈포상 타당성…문서없지만 자격 충분

– 일본군 인도네시아 점령하자 1호 체포령 장윤원…이유는?

1942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석유 공급을 위해 동남아 석유 공급의 거점인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공한다. 일본군은 1942년 3월에 자바 해전에서 승리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다.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먼저 화란총독부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네덜란드어: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인수했다.

1942년 일본군 인도네시아 침략경로
1942년 일본군 인도네시아 침략경로

인도네시아인들은 처음엔 대동아 공영권에 속아 넘어가 일본군을 네덜란드로부터의 해방자인 줄 알고 반겼다. 일본도 인도네시아의 민중을 동원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 자치권을 허용하였고, 인도네시아인 군대를 조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일본 점령으로 섬에 유배되었던 수카르노는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건 하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본도 네덜란드와 다름없는 제국주의 열강이였기에 인도네시아인들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다른 지역에서도 그랬듯이 본국의 자급자족 정책을 따른 점령군이 악랄하게 착취를 시작했다. 네덜란드 치하보다 더욱 잔악했다.

– 장윤원 선생은 누구?

장윤원 선생은 누구일까? 100년전 인도네시아 한인 디이스포라의 첫 주자로 인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나?

김문환씨 한인뉴스 기고 자료에 의하면 ‘仁同 張氏’ 장윤원(張潤遠)은 이조 말엽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낸 충청남도 온양 출신인 장석찬(張錫贊)의 외아들로 1883년 경성(京城)에서 출생하였다.

중추원 의관 장석찬의 독자(獨子) 장윤원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상과(商科)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은행 고위경영자를 지내면서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사재를 털어 망명객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여 오고 있던 터였다.

특히 1919년 3.1 만세 사건 당시 은행 돈을 빼돌려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한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의 체포령이 떨어지자 부인 백(白)씨와 두 아들 윤(崙)과 현(鉉)을 남겨둔 채 1919년 4월 단신 만주로 탈출한다. 3개월 후 북경(北京)에 잠입하여 중국 귀족인 창컹콴(Chang Kung Koan)의 보호를 받게 된다.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망명생활을 하던 장윤원은 창컹콴의 소개로 당시 화란령 동인도(인도네시아) 총독부의 고위관리인 안젤린(de Kat Angeline)을 소개 받는다. 일본경찰을 피해 망명생활을 하는데 중국보다 화란령 동인도가 더 안전하지 않겠냐는 안젤린의 권고로 1920년 9월 장윤원은 바타비아(자카르타)에 첫발을 내디딘다.

장윤원 선생은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실력을 바탕으로 바타비아 화란총독부의 일본어 수석통역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며, 1942년 일본군이 진주하기 전에는 화란총독부 일본국(日本局) 일본어담당 수석고문관(High Commissioner for the Japanese Language, Bureau of Japanese Affairs)의 직책까지 오르게 된다.

장윤원 후손 일가족. 사진 김윤환 기고문에서
장윤원 후손 일가족. 사진 김문환 기고문에서

1921년 장윤원은 자카르타에서 화교계 황항아(黃姮娥; Oey Hanga) 여사를 만나 재혼하여 남해(張南海), 창포(張菖蒲). 방기(張芳技), 순일(張惇一), 평화(張平和) 등 2남 3녀를 얻는다. 사회적 신분이 안정되자 장윤원은 이제 조국 독립운동에 힘을 보탤 방안에 골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몰고 온 태풍은 장윤원과 그 가족 모두를 형극(荊棘)의 길로 내몰고 만다.

– 한인군속 귀환위해 최초 한인회 만들어 구명운동에 앞장서

1942년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서 화란총독부를 인수하고 일본수석고문관으로 일하고 있던 장윤원 선생을 체포하게 된다. 장윤원 선생에 대한 자료를 연구한 김문환씨는 아래와 같이 전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인도네시아로 망명해 들어와 적대국(敵對國)인 화란총독부를 위해 일하는 장윤원이야말로 체포대상 제 1순위였다. 1942년 3월 말 일본 헌병대(憲兵隊; Kenpeitai) 요원들이 장윤원의 자카르타 멘뗑(Menteng) 자택에 들이 닥쳤다. 마침 장윤원은 반둥에 있는 근무처인 화란군 戰爭省(KNIL War Department)에 나가 있던 터라 장남인 남해(南海)에게 부친으로 하여금 조속히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일주일 후 귀가한 장윤원은 장남 남해와 함께 현 국방부 청사 자리(Jalan Medan Merdeka Barat No.13-14, Jakarta Pusat)에 위치한 제16군 사령부 헌병대에 출두한다. 쇠몽둥이로 매질을 당하는 부친을 뜬 눈으로 볼 수 없어 남해가 이를 가로막자 남해에게도 모진 구타를 가한 후에 수갑을 채워 버렸다. 심한 고문을 당한 부친과 같이 헌병대 건너편에 있는 경찰서 유치장에 3-4일 구금되었다가 인근에 있는 글로 독(Glodok) 형무소로 보내졌다”고 전했다.

기나긴 3년이 지나고 1945년 8월 15일 종전(終戰)을 맞아 장윤원 선생도 연합군 포로와 함께 스트루스윅(Struiswijk) 형무소에서 석방된다.

장윤원 선생은 3년동안 감옥에서 심한 고문과 고난의 감옥 생활로 인해 건강상태 악화되었지만 조선군속의 귀환에 팔 걷고 나섰다. 장남 남해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부친은 동포 출신 군속들이 전범 색출 문제로 귀국이 지연되자 전직 화란총독부 관리였던 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화란정부에 진정서를 제출하거나 인맥을 동원하여 동포들이 무사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뛰었다.

1945년도 장윤원의 나이는 이미 62세로 독립운동 선구자로서 동포사회의 최연장자였다.

1945년 12월 16일 재자바 조선인민회 반둥지부.사진 안승갑씨 회고록
1945년 12월 16일 재자바 조선인민회 반둥지부.사진 안승갑씨 회고록

당시 일본군정 당국과 일하고 있던 허영(許泳)영화감독과 고려독립청년당 간부들이 창립간사가 되어 1945년 9월 1일 자카르타에서「재 자바 조선인 민회(在爪哇 朝鮮人民會)」를 정식 출범시켰다. 동맹통신사 파견기자인 최호진(崔浩鎭) 초대회장,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인 박승욱(朴勝彧), 송병기(宋炳驥), 김규환(金奎煥), 김선기(金璇基)등 11명이 창립 간사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초대회장은 최호진이 아니고 장윤원(張潤遠)이었다고 증언하는 당시 회원들이 있고 장남해(張南海)의 자술서에도 부친이 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잠시 맡았다는 내용이 있는 점으로 보아 장윤원이 허 영, 최호진 등 창립간사들에 대한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임시 회장직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1946년 4월부터 연합군은 전범들을 가려내기 위해 한국인 출신 군속들을 포함하여 포로수용소 업무에 간여한 적이 있는 일본군 전원을 억류하였다. 한국인 포로 감시원을 포함한 일본군들이 연합군에 의해 전원 억류되었다.

이에 <재 자바 조선인 민회>는 김만수 회장을 마지막으로 약 7개월 동안의 활동을 중단하고 자동적으로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재자바조선인민회>는 회원 권익과 친목을 목적으로 인도네시아 땅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회(韓人會) 단체라 할 수 있겠다.

자카르타에서 발족한 <재 자바 조선인 민회>는 스망랑과 반둥에서도 민회가 결성되었다. 자카르타 꼬따(Kota) 지역에 위치하였던 민회에서는 극장도 설치되어 음악은 물론 한국무용과 연극까지 공연할 수 있었다. 고려독립청년당가(高麗獨立靑年黨歌)를 작곡한 김현재(金賢宰)가 작곡하고 한맹순(韓孟淳)이 작사한 회가(會歌)도 만들어졌다.

1946년 4월 초, 연합군 당국으로부터 귀국을 준비하라는 통지서를 접수한 민회 회원들은 모두 기뻐 날뛰며 노심초사(勞心焦思)했던 수개월 동안의 대기생활을 청산하고 딴중 쁘리옥(Tanjung Priok) 항으로 달려가 2개의 귀국선에 올랐다. 그러나 부산항으로 가는 줄 알고 있던 군속들이 탄 배는 엉뚱하게 싱가폴 항에 기항하더니 연합군에 의해 모두 하선명령을 받고 억류되게 된다. 이곳에서 일단 영국, 호주군에 의해 전범자들이 색출되고 나머지 군속들은 화란군이 기다리고 있는 자카르타 지역으로 다시 회송된다.

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장윤원 선생은 그간 최악의 건강상태를 무릅쓰고 재정적인 희생까지 감수하며 동포 군속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던 노력의 보람도 없이 한인 군속들이 다시 자카르타로 압송되어 글로독(Glodok) 형무소와 찌삐낭(Cipinang) 형무소에 분산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후 1947년 11월 23일 장윤원 선생은 일본 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조국을 떠나온 지 25년 만에 남녘 이국 땅에서 조국광복을 맞았지만 동포 군속 다수가 전범으로 전락하여 처형되거나 또는 실형을 선고 받는 비극을 목격하면서 결국 오랜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역만리 자카르타 자택에서 한 맺힌 생을 마감한다….”

√장윤원 선생 유가족 독립의지로 일어서

1947년 11월 가장을 잃은 장윤원 선생 유가족은 독립의지로 살아남아야 했다. 미망인 화교계 황항아(黃姮娥; Oey Hanga) 여사는 고 장윤원 선생을 대신해서 남해(張南海), 창포(張菖蒲). 방기(張芳技), 순일(張惇一), 평화(張平和) 등 2남 3녀를 키워야 했다.

한인군속에 대한 전범과 귀환의 아수라장속에서 장윤원 선생이 작고하자 황항아 여사는 화교사회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녀들을 키웠다.

장순일 아트마자야 대학 설립자 사진-1990년 6월 1일 아뜨마 자야 대학 개교 30주년을 맞아 교황 바오르 2세로 부터 수여 받은 「Silver Medal」을 목에 걸고 있는 장순일의 모습. 그는 1960년 이 대학을 공동 창립하였고 1961년에는 공과대학을 스스로 창설하여 1964-1968 기간 동안 공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89-1994년 기간에는 대학 상임위원장
장순일 아트마자야 대학 설립자 사진-1990년 6월 1일 아뜨마 자야 대학 개교 30주년을 맞아 교황 바오르 2세로 부터 수여 받은 「Silver Medal」을 목에 걸고 있는 장순일의 모습. 그는 1960년 이 대학을 공동 창립하였고 1961년에는 공과대학을 스스로 창설하여 1964-1968 기간 동안 공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89-1994년 기간에는 대학 상임위원장

1927년 10월 28일 자카르타에서 출생한 차남 순일(惇一)은 노력 끝에 화란으로 유학을 떠나 화란공과대학인 델프트 기술대학(Technische Hogeschool, Delft) 토목과를 졸업한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55년 유학시절 만난 화교계 연인 Kho Siok Pwan 여사(생존)과 텔프트(Delft)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재 화란 카톨릭 대학생 연합회>(Ikatan Mahasiswa Katolik Indonesia)를 결성하여 장순일은 초대 회장을 맡게 된다.

장순일은 사업(Indonesian Service Company Ltd.)으로 성공해 사재(私財)를 털어 프란스 세다, 빵 라이 낌(Pang Lay Kim; CSIS 공동 창립자이며 전 무역성 장관 Mari Elka Pangestu의 부친)을 비롯한 자카르타 지역 카톨릭계 청년 지식인과 <재 화란 카톨릭 대학생 연합회> 출신의 재정적인 후원을 이끌어 내 1960년 6월 1일 자카르타 반뗑(Lapangan Banteng)지역과 멘뗑(Menteng) 지역에 아뜨마자야 대학(Universitas Atma Jaya)을 개교한다.

1967년도 현재 스망기(Jalan Sudirman No.51, Semanggi, Jakarta Pusat) 캠퍼스와 쁠루잇(Pluit)에 있는 대학부속병원을 건축할 당시 공과대 학장이던 장순일은 건축본부장을 맡아 학교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 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12명의 설립자 명단이 나오는데 그 첫 머리에 나오는 ‘Ir.J.P.Cho’가 바로 장순일(Insinyur Junichi Paul Cho)의 일본식 발음의 약자이다.

스망기 캠퍼스 내 공과대학(Fakultas Teknik) 건물에는 공대 창설자인 장순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Gedung Paul Cho(장순일관)」라는 표시판이 붙여져 있다.

1989년 10월 12일 교황 바오르 2세가 이 학교를 방문하고 11월 23일 장순일 부 이사장에게 기사 작위(‘Ksatrio Orde Santo Paus Silvester’)를 부여한다. 또한 1990년 6월 1일 개교 30주년에는 민간인 신분에게 주어지는 최상위급 훈장인 Silver Medal(Equitem Commendatorem Ordinis Sancti Silvestri Papae)을 로마 교황으로부터 수여 받는 축복을 얻게 된다.

장순일 설립자는 슬하의 1남 3녀를 모두 박사, 석사로 교육시키고 1995년 운명한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못 다한 부친의 유지(遺志)를 이국 땅에서 실천에 옮긴 독립운동 후손이며, 자랑스런 한민족의 후예인 것이다.

한편 부친 장윤원과 같이 옥고를 치르며 부친 작고이후 동생들 뒷바라지하던 장남 남해(張南海)도 사업가로 활동하다 자카르타에서 작고하였다. 장녀(長女) 창포는 일본으로 출가하여 현재 요꼬하마에 거주하고 있으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막내 딸 평화(平和)는 명문 인도네시아대학(Universitas Indonesia) 영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1966년 한국과 인도네시아 영사관계가 수립되자 대사관 부인에게 인도네시아어를 가르치며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이후 장평화 여사는 한국 영사과 직원으로 채용되어 일하다가 1974년 여한종 서기관과 결혼하게 된다. 이후 여한종 서기관은 공사로 다시 인도네시아에 부임해 1995년에는 조선군속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영웅인 <코마르딘>이 ‘양칠성’이라는 한국이름 찾아주는 역할을 맡게 된다. 1995년 8월 19일 ‘양칠성 국적, 이름회복 시민운동본부’가 결실을 맺어 양칠성의 한글묘비 교체식을 주관했다.

여한종 공사의 양칠성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영웅인 한국인 이름찾기
여한종 공사의 양칠성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영웅인 한국인 이름찾기

당시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여한종 공사는 꼬데꼬 그룹의 최계월 회장, 김재춘 부회장 등 20여 명의 한인 관계자와 가룻 군수를 비롯한 관내 유지들이 다수 배석한 가운데 「CHILSUNG YANG, KOREAN」이란 영문과 「양칠성, 한국인」이라 함께 새겨진 새로운 묘비 교체식을 서부자바 가룻 영웅묘지에서 가졌다. 한인명예회복 앞장서온 장평화 여사는 2016년 10월 작고했다.

한편, 지난 9월 15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김창범 대사는 인도네시아 첫 한국인 디아스포라 장윤원 선생의 며느리인 고슈푸안 여사(Ibu Kho Siok Pwan 92세)를 대사 관저에서 만났다. 이날 인도네시아 한인역사 100주년 기념사 편찬위원회와 대사관 임직원은 장윤원 선생의 둘째 아들 장순일 총장의 가족을 처음으로 만났다.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며느리이자 차남 장순일 총장의 아내인 고슈푸안 여사(Ibu Kho Siok Pwan 92세)가 직접 그린 그림을 9월 15일 김창범 대사에게 선물하고 있다. 사진 한인포스트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 선생의 며느리이자 차남 장순일 총장의 아내인 고슈푸안 여사(Ibu Kho Siok Pwan 92세)가 직접 그린 그림을 9월 15일 김창범 대사에게 선물하고 있다. 사진 한인포스트

목발을 집고 관저로 들어오는 고슈푸안 여사(92세)를 김창범 대사가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포옹했다. “어서오세요 잘 오셨습니다” 김대사는 고슈푸안 여사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잊혀진 한인 100년을 다시 잇는 시간이었다.

김창범 대사는 유일하게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장윤원 선생의 둘째 아들 장순일(1927~1995)씨 미망인과 아들 가족 6명을 초청했다.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 역사의 시발점인 독립운동가 장윤원(1883~1947) 선생의 후손을 직접 만난 한인 100년 역사 집필진들은 감격해 했다.

이번 오찬 자리는 “100년전 장윤원 선생이 9월 20일 바타비야에 도착하고 이후 조선군속 귀환과 가족들이 한인사회 정착에 도움을 줘 이를 뿌리로 삼는다”고 가족들에게 전하면서 장윤원 선생 가족의 자료 요청 등 협조를 구하는 자리였다.

김창범 대사도 “장윤원 선생은 인도네시아 한인 역사의 시발점”이라며 “선생과 아들 순일씨가 남긴 사진이나 메모, 자료 등은 한인 100년사를 쓰기 위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순일씨의 아들은 “직계 후손들도 잘 모르는 선대의 역사를 한인 사회가 찾아줘서 감사하다”고 답했다.

√2020년 세계한인의 날에 훈포상 청원하자

2019년 한인포스트 신년호 권두언
2019년 한인포스트 신년호 권두언

한인포스트는 독립망명가 장윤원 선생에게 100년을 맞이하는 2020년 훈포상 대상자로 청원을 제언하고자 한다. 독립망명가 장윤원 선생 훈포상 청원은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한국 정부는 인도네시아 역대 한인원로 승은호 김우재 신기엽 조규철 양영연 회장에게 훈장을 서훈했다.
이어 한인역사 회복과 정체성 확립위해 장윤원 선생에게도 2020년 훈포상 청원을 요청한다.

정부는 매년 10월 5일 세계한인의 날 행사에 각국에서 추천된 한인동포들에게 훈포장을 서훈하고 있다. 비록 1947년 작고한 고인이지만 한인사회가 추천하여 유가족에게 서훈한다면 한인 100년의 역사를 바로세우고 이를 재평가하는 동포사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다.

또한 한인 100년 기념관 건립으로 1,400년 한국과 인도네시아 교류역사 되짚고 다가올 100년 비전 제시해야 한다. 또한 1946년 최초 인도네시아한인회 ‘재자바 조선인 민회’ 창립을 연계하지 않는 한인역사를 바로 세워야한다. 한인원로들은 “한인니 역사관이 없어 각종 주요자료가 방치되고 분실되고 있다. 이러다 3만명도 안되는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마저 소실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외친 신남방 정책은 한인니 역사의식 터전 마련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인도네시아 첫 코리언 디아스포라를 가치 평가하면서 한인 100주년 기념관을 통해 과거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에 100년전 1920년 9월 장윤원 선생의 인도네시아 첫 걸음은 이제 앞으로 다가올 한인사회 100년을 준비하는 첫 걸음이 되고 있다. -끝-

*참고 인용자료.
-재인도네시아 한인뉴스 통권 122호(2006년.8월호)
-독립운동 망명객 장윤원(張潤遠)과 그 후손들-김문환-
-‘赤道下の朝鮮人叛亂(적도에 묻히다)’-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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