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시대다. 일찌감치 친환경차 개발을 병행하던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들이 속속 내연기관 개발을 중지하며 자동차 산업이 요동치고 있다. 불씨는 유럽계 브랜드들이 당겼다. 폭스바겐과 볼보에 이어 벤츠도 올해 하반기 내연기관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전통 프리미엄 차를 대표하던 벤츠까지 내연기관 개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하며 글로벌 업계에 충격을 줬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메르세데스-벤츠 모기업인 다임러그룹은 전체 연구개발 예산을 전동화 부문에 투입할 계획이다. 내연개발은 중단하겠다는 의미다. 완성차 브랜드들이 내연기관 개발에서 손을 뗀다고 기존 자동차 시장 구조가 무너지는 건 아니다. 현재 수준의 내연기관 기술력만으로도 향후 몇 십 년은 친환경차와 공존이 가능하다.
관심사는 내연기관 개발 중단을 선언한 벤츠의 의도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프리미엄 강자 지위를 가진 벤츠 입장에서 굳이 내연기관 중단을 선언하면서까지 친환경차 시대에 대비하겠다고 밝힐 필요는 없다. 자동차 강국인 독일을 대표하는 브랜드인 만큼 제품으로 실력을 증명하면 되는데 모든 개발 예산을 전동화 부문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조급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저무는 내연기관, 조바심 내는 유럽계 브랜드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벤츠를 포함한 유럽계 브랜드들이 내연기관 개발 중단을 발표한 기저에는 깨진 디젤 환상과 친환경차 부문에서 치고 올라오는 경쟁 브랜드들에 대한 위기감이 복합적으로 깔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내연 100년 역사를 주도한 만큼 친환경차 부문에서도 지위를 잃지 않겠다”는 자기다짐 성격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하이브리드는 일본, 수소차는 한국(현대자동차), 전기차는 중국이 강점을 보이고 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전통 내연기관에 강점을 보여 온 유럽계 브랜드들이 긴장할 만한 환경이다.
디젤게이트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 연방자동차청(KBA)은 올해 8월 배출가스 조작 소프트웨어가 발견된 벤츠 차량 28만대의 리콜 명령을 내렸다. 현지 검찰은 1조원 이상의 벌금부과를 예고했다. 자동차 시장의 트렌드 변화도 영향을 줬지만 현재 진행 형인 디젤게이트 여파는 독일 대표 브랜드인 벤츠에 특히 부담이 됐다. 벤츠가 “내연기관 개발 중단”을 선언한 배경이다. 운터투르크하임 공장에서 디젤엔진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기로 결정한 점도 디젤게이트의 후폭풍을 방증한다.
문제는 벤츠의 선언과 달리 과거처럼 유럽계 브랜드가 친환경차 부문에서도 압도적인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1차 산업혁명으로 공업생산력이 올라간 유럽은 이를 발판 삼아 제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이때 내연기관의 실용화와 보급이 빠르게 진행됐고 벤츠 창업자인 칼 벤츠가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개발하며 내연기관 시대를 열었다.
1970년대 들어 일본계가 유럽 브랜드와 경쟁할 수준까지 올랐지만 내연부문의 프리미엄 지위를 뺏기는 어려웠다. 후발주자들은 대중차 브랜드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 기반의 국력 차이가 빚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전기차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대중차에서 경험을 쌓은 우리나라는 현대차가 세계 최초로 수소차 양산에 성공한 이후 1회 충전거리가 600㎞ 이상인 넥쏘를 출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은 하이브리드 부문의 전통 강자다.
유럽 환경규제 강화, 디젤차 기반 벤츠도 ‘발등의 불’
독일계 브랜드 중에서는 그나마 폭스바겐이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중국 합작법인을 통해 내년 중국에 5조원 이상을 투입할 계획인 폭스바겐은 전기차 공장 2곳의 건설을 추진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10년 이내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는 전기차 라인업만 75종에 달한다.
반면 벤츠는 전기차 브랜드 최초의 순수전기차 EQC 400을 시장에 내놨지만 다소 떨어지는 성능과 높은 가격으로 호불호가 갈린다. 해당 차량 가격은 1억원이 넘는 반면 1회 충전거리가 309㎞에 불과해 전기차 부문의 기술력을 갖췄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강화되는 환경규제와 경쟁 브랜드 선전에 위기감을 느낀 벤츠가 효율화를 달성하지 못한 채 급하게 순수전기차를 출시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는 벤츠가 내연기관 개발 중단을 발표한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럽 시장에서 환경규제가 더 강화되고 있어 디젤차 기반인 벤츠로서는 친환경차 비중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 역시 “강화되는 환경규제에 따라 전기차를 출시했다는 구색 갖추기에 의미를 둘 수 있다”며 “다만 향후 모델에서는 상품성 개선 여지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new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