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 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를 휘적이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치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긴 별
알 수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시작 노트:
몇 년 전, 필자는 충북 옥천의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찾은 적이 있었다. 키 낮은 담장 넘어 해당화꽃이 만발한 시인의 소박한 꿈이 서려 있는 오두막집은 그 옛날의 추억을 간직한 듯 아늑하고 서너 평쯤 되어 보이는 두 칸짜리 방에 좁은 튓마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작은 공간이 위대한 시인 정지용이 문학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곳이다.
충북 옥천 땅은 청산 벽해와는 멀리 떨어진 내륙이다. 야산에 맑은 물이 흐르고 빈농들이 사는 고장이지만, 옛날부터 교육자가 많이 나오고 일찍이 해외 유학에 눈을 뜨는 등 인재를 많이 배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에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고 「향수」를 쓴 시기 역시 정지용 시인이 일본에 유학 중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쓴 시라고 한다.
타국에 살면서 느끼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추억이나 사물을 이처럼 리얼하고 절절하게 묘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에서 시인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3연의 ‘파란 하늘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에서는 꿈을 찾아 헤매는 청춘 시절의 고민과 방황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이 ‘함부로 쏜 화살’이다. 천방지축하던 젊은 시절을 질책하는 반어적 어법이 가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그다음 2연과 4연, 5연에서 시인은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다. ‘질 화로의 재가 식어 가면’에서 화자는 춥고 외로운 밤, 늙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4연에서는 ‘밤물결처럼 검게 빛나는’ 청순한 누이의 머릿결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아내 사랑에 대한 속마음을 자제한다. 힘겨움으로 찌든 아내의 평범한 겉모습은 굳이 수식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우리의 정서에 물을 주고 마음속에 사랑을 심는다. 좋은 시는 그 속에 자연과 인간의 향기를 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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