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 이야기(25) 게으른 천재여 안녕

허 달 (許 達) 1943 년생 서울 출생, 서울고, 서울공대 화공과, 서울대 경영대학원 졸업 SK 부사장, SK 아카데미 초대 교수, 한국케미칼㈜ 사장 역임 한국코칭협회 인증코치 KPC, 국제코치연맹 인증코치 PCC 기업경영 전문코치, 한국암센터 출강 건강 마스터 코치 저서: 마중물의 힘(2010),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2011),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2012)

자기개발서가 유행인 시대이다.

어쩌다 보니 내가 펴낸 ‘마중물의 힘’, 잡문(雜文) 모음도 내 뜻과는 상관 없이 자기개발서로 분류되기도 한다. 행복을 정의하고, 이를 추구하는 방법을 혹자는 리더십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혹자는 삶의 지혜를 찾는 구도(求道)의 길이라 하기도 하여 자기개발서의 단골 주제가 되고 있다.

한때 내가 코칭을 맡았던 고등학생 하나는 부모가 영국의 고등학교에 유학을 시키는 중이었는데, 자기개발서로부터 효과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입증되지 않은 기대 때문에 이를 남독(濫讀) 하고 있었다. 읽은 자기개발서가 이미 백 권이 넘었을 것이라고 열 적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영국에서 공부하다 이런저런 일에 막히면 혹 그런 것을 뚫어주는 기발한 방법은 없는가 하여 인터넷에서 신간 자기개발서의 서평을 뒤적이느라고 아까운 공부 시간을 낭비한다 자탄(自嘆)하니, 일종의 자기기만의 방법으로 자기개발서 읽기를 선택한, 이를 테면 중증(重症)의 개발서 중독인 셈이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체험해 본 적은 없다면서도 “그야 마음 비우기 아닌가요?” 하고 애 어른 같은 무감동한 표현을 사지선다형(四枝選多型) 문제집 정답 난처럼 거침없이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 고딩의 문제야 그렇다 치고, 내일 모레 팔십을 바라보는 내가 새삼스럽게 깨닫는 행복이란 과연 어디 있는 것일까? 결국은 오십 보 백 보인 것이, 눈 앞에 현전(現展)하는 일상의 행복을 알아채지 못하고 애써 다른 곳에서 정답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미불의 초계시
미불의 초계시

게으르기를 즐겨 하나
친구는 사양키 어려워 [好懶難辭友]
궁한 줄을 알지마는
어찌 통하기를 바랄 손가 [知窮豈念通]
가난하지만
찌든 삶은 살지 않았고 [貧非理生拙]
병들어
마음 기른 공을 깨닫는다 [病覺養心功]

작은 밭은
손님 머물게 할 만 하고 [小苗能留客]
푸른 하늘은
나르는 기러기를 싫증 내지 않네 [靑冥不厭鴻]
가을 배 돛 올려
가씨 노인 방문 길 [秋帆尋賀老]
술 싣고
강동을 지난다 [載酒過江東]

서예 공부할 때 임서(臨書)하던 중국 송(宋) 미원장(미불米巿) 선생 초계시(苕溪詩) 중 마음에 드는 마지막 두 연(聯)을 옮긴 것이다. 그럴 듯 하게 포장한 것만 다를 뿐, 행복을 남의 글에서 찾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하는 스스로의 반성이 마음 속에서 머리를 든다.

‘게으른 천재여 안녕’이라고 제목을 써 놓고 코칭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하려던 것인데, 게으름을 설명하려다 사설이 그만 길어졌다. 꼭 게으름과 한가로움이 행복이라고 강변하지는 않겠지만, 코칭이 추구하는 잠재력과 창의력은 창조적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리드미컬한 나선형 상승곡선 위에서 행복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코치는 경청과 질문을 마중물 삼아 고객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시각을 다각화 하여 창의력을 발현케 함으로써, 고객 내면세계 비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천재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능동적 역할도 하지만,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어렵사리 발현된 천재성을 제대로 챙기어 결과로 만들어 갖지 못하고, 흐지부지 낭비하는 일을 예방하는 파수꾼 역할도 자처한다.

한 마디로 고객으로 하여금 책무를 선택하게 도와주는 일인데, 언젠가의 칼럼에 인용하였던 예를 다시 들어보겠다.

어느 날의 코칭 장면에서, 그날의 코칭 결과로서 고객이 천재성의 좋은 아이디어를 내어 실천에 옮기겠다고 결심하였다고 가상해 보자.

“그 일을 언제 실천하시겠습니까?”
“실천을 위하여 누구의, 어떤 도움이 필요합니까?”
“코치인 내가 돕는다면 무엇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코치인 내가 그 사실(실천이 개시되었다는)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등의 질문에 답을 받아 두는 것이 그것이다.

필자가 SK 아카데미 교수 시절 강의한 ‘최종현 사장학’에서는 이것을 경영자의 역할로 보아 Lead, Help, Check (L/H/C)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성원을 임파워(Empower)하여 적극적 두뇌활용이 가능하도록 창의적 자유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믿고 맡기기(Empowerment)’ 리더십의 기본 출발점이다. 그러나 무조건 맡기기만 하는 경우, 높은 창의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게으른 천재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따라서 높아진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업무의 위양(委讓-Delegation)과 성취를 위하여는 L/H/C 특히 자발적 책무의 선택을 종용하는 일과 이를 확인하는 확인 과정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코칭 리더십의 책무부여 원칙과도 잘 부합한다 하겠다.

눈물 많던 청소년 시절 읽었던 프랑소와즈 사강 저(著)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제목의 책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안녕’이 ‘이제는 슬픔이여 그만 헤어지자’, 잘 가라는 뜻의 ‘안녕’인 줄 지레 짐작하였었는데, 어느 날 불문학 전공의 아내가 이 소리를 듣고 배꼽을 잡는다. 원어(原語) 제목으로 듣고 보니 ‘봉쥴 트리스떼스’ 즉 ‘안녕? 슬픔 (오늘도 또 만났네)’라는 뜻의 만남의 인사 ‘안녕’이었다는 것이다.

'슬픔이여 안녕' 책 표지
‘슬픔이여 안녕’ 책 표지

‘게으른 천재여, 안녕’

코칭 주제인 이 글 제목으로 빌어온 ‘안녕’은 헤어지자는 뜻의 ‘안녕’, 아니면 천재의 일상에서 책무 이행을 확인하려는 만남의 인사 ‘안녕’ 중 어떤 뜻의 ‘안녕’이었을지, 코치 지망생을 포함하여 독자 제현(諸賢)이 한번씩 챙겨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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