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도네시아 외교 40년사(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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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태동기 : 오랜 기다림, 그리고 관계개선의 시작
(원고-이천희 서기관)
(1949년 – 1972년 / 국가승인 이후 외교관계 수립 전)
제2편 초창기 : 협력과 신뢰의 토대 마련(원고-이인호 총영사)
(1973년 – 1988년 / 외교관계 수립 이후 전두환 정부까지)
제3편 발전기 : 실질협력과 교류 확대(원고-전조영 참사관)
(1988년 – 2003년 /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
제4편 성숙기 : 전략적 동반자 관계,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동행
(원고-고경민.이천희 서기관)
(2003년 – 2013년 / 노무현 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주인도네시아한국대사관(대사 김영선)은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4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인도네시아 관계 발전사를 종합한‘한국-인도네시아 외교 40년사’를 발간했다.

한국 대사관은‘한국-인도네시아 외교 40년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 3월부터 편찬위원을 선정하고, 양국 국가기록원 자료조사를 시작한지 6개월만에 귀중한 사료집을 세상에 선보였다.

외교사 발행에 앞서 대사관 임직원 및 한인동포사회 편찬위원으로 구성된 편찬위원회는 목차 작성, 사진 및 문서 수집 등 본격적인 편찬 작업 착수했다.

‘한인니 외교 40년사 편찬위원회’는 김영선 대사를 비롯하여 이인호 총영사, 전조영 참사관, 이천희 서기관, 고경민 서기관, 정선 한인포스트 대표, 정리에 김소진씨가 참여했다.
본지 한인포스트는 ‘한인니 외교 40년사 편찬위원회’언론 주관사로 선정되어, 인도네시아 주요 언론과 민관 자료를 수배하고 발췌하는 일을 도맡았다.

‘한인니 외교 40년사’는 한-인도네시아 관계 발전사를 4개의 시기인 태동기, 초창기, 발전기, 성숙기로 구분하고 각 시기별 집필자를 선정하여 문안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10월 중순 박근혜 대통령 인도네시아 국빈방문 후 관련 내용 추가 보완작업을 통해 지난 11월 13일 최종본이 출판되어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다.

‘한인니 외교 40년사’는 수교기념 사업에 역사성과 계속성을 부여함으로써 향후 한-인도네시아 외교 50년사 등 후속 사업을 위한 토대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지는 5만여 한인동포 독자들을 위해 한국-인도네시아 외교 40년사 발간의미를 재조명하고, 주요자료를 발췌 요약하여 4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Ⅲ. 발전기(1988-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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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는 1988년 11월 이중과세방지협정, 1989년 9월 항공협정, 1991년 2월 투자보장협정, 1994년 4월 문화협정, 2000년 11월 범죄인인도조약, 2002년 3월 자원협력협정 등 다방면의 협정 체결을 통해 한-인도네시아 양국간 실질협력 확대의 제도적 틀을 구축하고 이에 기반하여 협력 관계의 발전을 도모한 기간이다.
또한, 물적 교류의 확대를 위한 법적인 체계와 함께 정부 협력 메카니즘이 활성화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상품 수출은 물론 해외 투자 및 자원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장치를 운용될 수 있었다.

협력 관계 발전의 또 하나의 계기 제공 :
노태우 대통령 공식 방문 (1988년 11월)
1988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공식 방문함에 따라 아태지역의 번영 및 한-인도네시아 양국간 상호보완적 협력 관계의 확대·발전을 위한 “공식협의 대상국” 지정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등 발전의 성과를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한-인도네시아 양국간 협력 확대 관련 파당시(Padang) 도로 건설 등 인프라 구축 지원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한국의 자본·기술이 참여하고 투자보장협정의 조기 타결 및 자원 공동 개발을 장려하기로 합의하였다.

새로운 투자 유망지로 부상된 인도네시아 :
우리 기업의 대인도네시아 투자 확대
(1988년-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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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992년간 우리 기업의 대인도네시아 투자는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섬유, 봉제, 신발, 완구 등 분야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의 저임, 풍부한 자원 및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과 곧바로 연결됨으로써 투자가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이중과세방지협정(88년 11월), 투자보장협정(1991년 2월) 등을 통한 체계적인 제도 구축에도 힘입은 바 크다.
이 시기에 기술집약 산업인 전자산업과 바이오 산업의 진출이 시작되어 오늘날 LG전자, 삼성전자, CJ와 같은 투자성공 사례를 낳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공적개발원조를 통한 협력 모멘텀 형성 :
유무상 원조 확대

1987년 12월 파당시 우회도로 건설 사업으로 시작된 대인도네시아 유상원조 규모는 승인 기준 2002년까지 총 8건, 1.6억불을 기록하였으며, 1991년 4월 한국국제협력단(이하 “KOICA”)의 설립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된 무상원조는 2011년까지 총 1억 537만불을 지원하면서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한 신뢰관계를 발전시켰다.

KOICA 사무소 개소
1992년 9월 1일 KOICA의 제1호 사무소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개소하였다. 인도네시아 사무소의 개소는 KOICA가 대 인도네시아 무상원조사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계기가 되었으며, 개소 첫해 33만불에 불과하였던 KOICA의 인도네시아 무상원조 규모가 2010년 이후에는 연간 2,000만불 수준으로 60배 이상 증가되었다.

인적 교류 활성화를 위한 물적 기반 형성 :
항공협정(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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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도네시아간 인적 교류는 1989년 7월 항공협정 체결에 이어 KAL 취항과 1989년 9월 가루다 항공의 한국-인도네시아 노선 취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95년 11월부터는 주 3회에서 주 7회로 확대되고 서울-자카르타만이 아닌 발리 덴파사르로 기착지점이 추가되었다. 2000년 5월부터는 항공협정 2차개정을 통해 주 10회로 늘어났으며 2012년 6월 5차개정에서는 주 23회까지 증대되었다.

자원 확보를 위한 계속적 노력 :
유전 개발(1993년 12월)

서마두라 유전 개발 사업에 이어 1993년 12월 남방개발의 폴랭 유전개발이 이루어져 5.4천 b/d(일당 배럴)을 생산하였으며, 2002년 12월 석유공사의 SES 유전개발이 이루어져 50.6천 b/d(일당 배럴)을 생산하는 등 인도네시아 광구들은 베트남 개발 유전과 함께 우리나라와 가까운 지역에서의 생산이라는 장점과 함께 자원수급률 제고에 기여하게 된다.

포괄적 협력 관계 발전 :
김영삼 대통령 인도네시아 국빈 방문(1994년 11월)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하여 제네바 핵합의 이행 촉구 등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 강화, 액화천연가스(LNG)의 안정적 공급 등에 대해 협의하는 한편, 역내회원국간의 개방적 지역협력을 지향하는 보고르 APEC 회의에 참석하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 중 두 번째로 인도네시아를 순방한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13일 대통령 궁에서 수하르토 대통령과 단독정상회담을 갖고 두 나라간의 경제협력과 아-태 지역의 외교협력 등 전반적인 협력 관계 증진 방안에 관해 논의했다.

좌절과 시련, 그리고 새로운 도약_
아시아 외환위기 발생(1997년 –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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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에서 인도네시아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 및 인도네시아의 급격한 경기 침체로 인도네시아 진출 우리 기업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달러당 2,000 루피아 수준이던 환율이 15,000 루피아로 급상승함에 따라 수출 위주의 일부 업체는 혜택을 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위기는 정정 불안을 초래했다. 1998년 5월에 32년간 장기 집권하던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고 하비비-와히드-메가와티로 이어지는 정부가 출범했다. 경제 위기, 정정 불안 및 치안 불안으로 종족 분쟁 및 인종 갈등이 촉발되고, 동티모르의 독립과 더불어 이리안 자야, 아체 지역 등의 분리 독립 움직임은 인도네시아 영토의 일체성에 심각한 도전으로 작용했다. 9.11 테러 이후 2002년 10월 발리에서 대규모 테러가 발생함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테러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경제위기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노사분규,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
노동법 개정 등 기업환경이 악화됨에 따라 한인기업들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공동의 가치 구현을 위한 협력 관계 발전 :
김대중 대통령 국빈 방문(2000년 11월)

김대중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추진이라는 공통의 가치에 입각하여 새로운 협력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급 교환 방문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2000년 2월에는 와히드 대통령(Abdurrahman Wahid)이 한국을 국빈 방문했으며, 2000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했다. 2002년 3월에는 메가와티 대통령(Megawati Soekarnoputri)이 국빈 방한하여 양국간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공급 확보, 우리의 대 북한 화해 협력 정책과 인도네시아의 영토 일체성에 대한 지지 확인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 또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추진을 공동 모색함으로써 양국간 협력 관계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였다.
남북한 동시 방문 :
메가와티 대통령 국빈 방한
(2002년 3월30일-4월1일)
메가와티 대통령(Megawati Soekarno putri)은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을 국제사회로 복귀시키려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원국들의 대전략의 일환으로 2002년 3월 28일에서 30일까지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방북후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방한하여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이 회담에서 메가와티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적 대화 재개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북핵 문제 관련 북한의 핵보유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동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6자회담 당사국들의 노력을 촉구했다.

한국어 및 한국학 열정 점화
1980년대 말부터 인도네시아 내에 한국어 교육 과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6년 최초로 인도네시아 국립대학(UI:Universitas Indonesia)의 인문대학 학부에 한국어가 선택과목으로 비학점 과정에 포함되었다. 1987년 6월에는 나시오날 대학교(UNAS:Universitas Nasional) 내 한국학센터가 아세안 국가중 최초로 설치되었고, 1994년 9월에는 한국어과 Diploma 과정이 최초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1995년 9월에는 가자마다대학(UGM:Universitas Gajamada)내 한국어 선택 과목이 개설되었고 1996년 10월에는 한국학센터가 설치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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