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비야 임시군정 일본군 성노예 위안소 재판 “사형” 판결 집행

SHARE

바타비야 임시 군사법정 일본군 성노예위안소 운영 재판 판결문

 “포로에 대한 부당대우” 및 “강간”
“강제매춘을 위한 부녀자 유괴” “매춘강요”

No. 72/1947 판결문 231
바타비아 임시 군사법정은 다음의 피고인들에 대해 법무관이 청구한 내용에 대해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Ⅰ. XXXXXXXXXX 45세, 일본 히로시마 출생(1902/10/1일생), 일본군 대령
Ⅱ. XXXXXXXXXX 39세, 일본 오사카, 히가시구, 이마바시 출생(1908/4/11일생), 일본군 군속대령
Ⅲ. XXXXXXXXXX 38세, 일본 아이치현, 카수가이시, 오아자 카수가이 출생(1910/1/14일생), 일본군소령
Ⅳ. XXXXXXXXXX 46세, 일본 후쿠오카현 치큐조군 시모킬무라 출생(1901/6/7일생), 일본군 소령
Ⅴ.XXXXXXXXXX 60세, 일본 후쿠오카현 치큐조군 시모킬무라 출생(1889/9/28일생), 일본군 소령
Ⅵ. XXXXXXXXXX 44세, 일본 사가현 키시마군, 카미오다, 코보쿠무라 출생(1902/12/13일생), 일본군대위
Ⅶ. XXXXXXXXXX 30세, 이바라기현 미토출생(1918/3/18일생), 일본군 예비역대위
Ⅷ. XXXXXXXXXX 44세, 일본 미야기현 니시네출생(1903/2/4일생), 일본군 상사
Ⅸ. XXXXXXXXXX 41세, 일본 도쿄, 아사쿠사구 출생(1907/10/9일생), 일본군 군속 민간인
Ⅹ.XXXXXXXXXX 32세, 일본 와카야마현 히사기무라군 출생(1915/10/29일생), 일본군 군속 민간인
XI. XXXXXXXXXX 24세, 일본 와카야마현 아리타군, 야하타무라, 아자시미주 출생(1923/2/14일생), 일본군 군속 민간인
XII. XXXXXXXXXX 39세, 야마나시현 키타추루고리 출생(1909/1/24일생), 일본군 군속 민간인상기(上記)인들은 현재 티피낭(Tjipinang)교도소에 구금되어있음.

이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1947년 11월 22일, 법무관이 임시군사법정에 청구한 피고인들의 혐의는 다음과 같다. 전쟁 법규 및 관례에 관한 조약(the laws and customs of war)을 무시하고 1944년 아래에 명시된 날짜 및 장소,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적대국인 일본 국민으로써 행한 전쟁범죄.

피고 1: XXXXXXXXXX
1944년 3~4월, 피고가 세마랑(Semarang)의 병참장교(heitan-officer)로 있을 때, 자신의 휘하에 있던 민간인 및 병사들에게 총 35명의 여성들 – 이들 여성들은 당시 일본 점령당국에 의해 세마랑의 세마랑 오스트(Semarang-Oost), 게당간(Gedangan) 및 할마헤이라(Halmaheira) 등의 수용소 및 암바라와(Ambarawa)의제 4수용소 및 제 6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고 세마랑에 있던 쇼코클럽(Shokoclub), 세마랑클럽(Semarang-club), 히노무라(Hinomura) 및 후타다소(Futadaso) 등의 위안소에 감금되어 있었음. 강제로 매춘 및 강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당시 피고는 이러한 전쟁범죄행위가 행해지고 있거나 혹은 행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적어도알고 있었고 혹은 당연히(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어야 했다.

피고 2: XXXXXXXXXX
1944년 2월 29일경, 적어도 1944년 2월 저녁, 피고는 위안소 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세마랑의 쇼코클럽에서 자신과 혼외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하여 XXXX를 강간함.

피고 3: XXXXXXXXXX
(a) 1944년 2월 26일경, 적어도 1944년 2월, 피고가 세마랑의 병참장교부관(deputy heitan-officer)으로 있을 때, 이 지역의 케나리란(kenarielaan)가(街)에 있던 건물에서 총 35의 여성들 -이들 여성들은 당시 일본 점령당국에 의해 세마랑의 세마랑-오스트(Semarang-Oost), 게당간(Gedangan) 및 할마헤이라(Halmaheira) 등의 수용소 및 암바라와(Ambarawa)의 제 4수용소 및 제 6수용소에이미 수용되어 있었음- 을 위안소 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다른 4곳의 장소로 이송하여 그 곳에서 매춘부로서 일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피고는 이들 여성들 중 자신의 의사에 따라 매춘행위를 하려고 한 여성의 수가 없었거나 혹은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폭력이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알고 있었고 혹은 당연히(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어야 했다.

(b) 1944년 2월 29일경 오후, 적어도 1944년 2월, 피고가 세마랑의 병참장교부관(deputy heitan-officer)으로 있을 때, 위안소 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쇼코(Shoko)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a)에서 언급된 여성들 중 5명을 협박하여 매춘을 강요하였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당 클럽을 찾아오는 일본인 손님들과 자발적인 성관계를계속 거부할 경우, 여성들의 친척들에 대한 살해 위협 및 그들에 대하여 보복행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c) 1944년 2월 29일 혹은 29일경 저녁, 적어도 1944년 2월, 피고는 (b)에서 기술된 장소에서 자신과 혼외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하여 Mrs. XXX를 강간함;

(d) 피고는 1944년 2월~4월 경, 세마랑의 병참장교부관(deputy heitan-officer)으로 있을 때, 자신의 휘하에 있던 민간인 및 병사들에게 (a)에서 언급된 여성들을‘쇼코클럽(Shokeclub), 세마랑클럽(Semarang-club), 히노마루(Hinomaru) 및 후타바소(Futaba-So) 등의 위안소에 감금하여 강제로 매춘 및 강간하도록 허용하였다. -중간생략-

피고 5: XXXXXXXXXX
(a) 피고는 1944년 2월~4월 경, 혹은 적어도 스플렌디드 호텔(Hotel Splendid)-당시 세마랑의 헤닐란(Genielaan)에 위치하고, 세마랑클럽(Semarang-club)(Semarang Curaboe)으로 불리던 이 위안소는 나중에 구(舊) 브뤼셀 호텔(Hotel van Brussel)에 세워짐- 의 의무장교로 있을 때, 위에서 언급된여성들이 위안소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이들에게 충분한 치료 및 의약품 등의 제공을 거절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비위생적인 상태로 지내게 함으로써, 모집된 여성들과 소녀들을 매우 부당하게 대우하여 매춘부로 일할 것을 강요했다.

(b) 1944년 2월~4월 경, 피고가 ‘세마랑 사관생도 훈련학교’에 배속되어 책임의무장교로 있을 때, 자신 휘하에 있던 군의관들이 총 35명의 여성들 – 이들 여성들은당시 일본 점령군에 의해 사마랑의 세마랑 오스트(Semarang-Oost), 게당간(Gedangan) 및 할마헤이라(Halmaheira) 등의 수용소 및 암바라와(Ambarawa)의제 4수용소 및 제 6수용소에 이미 수용되어 있었고, 세마랑의 쇼코클럽(Shokeclub), 히노마루(Hinomaru) 및 세이운소(Seiunso) 등의 위안소 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곳에 이미 수용되어 있었음 – 에게 충분한 치료 및 의약품 등의 제공을거절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비위생적 상태에서 지내게 함으로써 이들을 매우 부당하게 대우하도록 허용하였다.

피고 6: XXXXXXXXXX
(a) 피고는 1944년 2월~4월 경, 또는 적어도 당시 쇼코클럽(Shoko-club)으로 불리던 위안소의 의무장교로 있을 때, – 이곳은 당시 세마랑의 일본군 장교 및 동등한지위(권리)를 가진 일본 민간인들을 위해 운영되던 곳임- 위에서 언급된 위안소에수용 및 감금되어 있던 부녀자들을 매우 부당하게 대우하여, 이들에게 매춘행위를강요했다. 이들에게 충분한 치료 및 의약품 등의 제공을 거절하고, 만족스럽지 못한비위생적 상태에서 지내도록 함으로써.

(b) (a)에서 언급된 시간 및 장소에서, Mrs. XXXXXXXXXX을 포함한 (a)에서 언급된부녀자들 중 일부에게 자신과 혼외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하여 강간함.

피고 7: XXXXXXXXXX
1944년 23일~26일경 혹은 적어도 1944년 2월 경, 세마랑(Semarang) 및 암바라와(Ambarawa)에서 부녀자들을 유괴하여 매춘을 강요했고, 혹은 적어도 자신 휘하에있던 부하들- 적대국인 일본을 위해 일하던 일본 국민 및 비 일본국민 혹은 외국인-에게 위에서 언급된 부녀자들을 유괴하여 매춘을 시켰음. 즉 사마랑의 세마랑 오스트(Semarang-Oost), 게당간(Gedangan), 할마헤이라(Halmaheira) 및 암바라와(Ambarawa)의 제 4수용소 및 제 6수용소 등의 수용소에서 부녀자들을 선발하거나혹은 앞에서 언급된 부하들을 시켜 선발하게 하여 그들을 유괴하여 이미 언급된 수용소 및 세마랑(Semarang)의 케나리란(kenarielaan) 거리에 위치하고 있던 장소에서 일본당국을 위해 사무업무를 하게 될 것이라는 구실로. 따라서, 피고는 유괴된부녀자들 중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매춘을 지원한 사람의 수가 없었거나혹은 소수였기 때문에 무력이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혹은 당연히(충분히) 짐작하도 있었어야 했다.

피고 8: XXXXXXXXXX
1944년 2월~4월 경, 당시 세마랑(Semarang) 내 위안소 시설이 갖추어져 있던 세마랑 큐라부(Semarang Curaboe)라 불리던 곳에서 자신과 혼외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하여 Mrs………를 10차례 혹은 최소한 여러 차례 강간하였음.

피고 9: XXXXXXXXXX
(a) 1944년 2월~4월 경, 세마랑(Semarang)의 헤닐란(Genielaan)거리에 위치한 스플렌디드 호텔(Hotel Splendid) 내 – 당시 세마랑클럽(세마랑 큐바부)(Semarang-club(Semarang Curaboe))로 불렸고, 그 후 세마랑의 구(舊) 브뤼셀호텔(Hotel van Brussel)에 세워짐- 위안소 용도로 쓰이던 건물의 포주로 있던 피고는 부녀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함: 총 7명이었던 이들은 일본 점령당국에 의해 이미 수용되어 있었으며, 그 위안소를 찾은 일본인들과 혼외 성관계를 거부할 때마다 피고는 이들을 되풀이하여(여러 차례)구타하였다.

(b) (a)에서 언급된 시간 및 장소에서, 자신과 혼외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하여 Mrs. XXXXXXXXXX를 강간함.

피고 10: XXXXXXXXXX
피고는 1944년 2월~4월 경, Tjandi Baroe Semarang 내 당시 세이운소(Seiunso)로 불리던, 위안소 용도로 쓰이던 건물의 포주였던 피고는 부녀자들로 하여금 매춘을 강요함. 총 7명이었던 이들은 일본 점령당국에 의해 이미 수용되어 있었으며, 그 위안소를 찾은 일본인들과 혼외 성관계를 거부하면, 특히 군 위안소로 보낼 것이라고 협박하여 매춘을 강요하였다.

피고 11: XXXXXXXXXX
(a) 1944년 2월~4월 경, 세마랑 내 파비용 호텔(Hotel du Pavillon) 뒤편 Belakang Kebon거리에 있던 이전 중국 호텔 안의 위안소 – 당시 히노마루(Hinomaru)라 불렸음- 포주였던 피고는 부녀자들로 하여금 매춘을 강요함; 총 11명이던 이들은, 그 위안소를 찾은 일본인들과 혼외 성관계를 거부하면, 수용소에 남겨진 친척들에게 보복 할 것이라고 협박하여 매춘을 강요하였다.

(b) (a)에서 언급된 시간 및 장소에서, 자신과 혼외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하여Mrs. XXXXXXXXXX를 강간함.

피고 12: XXXXXXXXXX
1944년 2월~4월 경, 당시 쇼코클럽(Shoko-club)으로 불리던 세마랑 내 위안소 용도로 쓰이던 건물의 포주였던 피고는 부녀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함. 총 8명이던 이들은 일본 점령당국에 의해 이미 수용되어 있었고, 그 위안소를 찾은 일본인들과 혼외 성관계를 거부하면, 환경이 훨씬 열악한 군 위안소로 보내지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여 매춘을 강요하였다.

이들 전부 혹은 대다수가 앞에서 언급된 강간, 강제매 춘을 위한 유괴, 매춘 강요 및 전체적인 부당 대우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언급된 사실들만으로도 1946년 법령집 제 45호, 전쟁범죄에 관한 형법(the Penal Law Decree on War Crimes) 제 4조 이하 항에 따라 처벌가능하다. 1948년 1월 6일 소환명령을 발부하여, 피고인들을 1948년 1월 26일 월요일 오전 8시 30분, 당시 워털루광장 오스트 1번가(waterloo-plein No.1)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고등법원건물에서 진행되고 있던 바타비아 임시군사법정에 출두하도록 소환하였다. 군 법무관은 이들 피고인들에게 청구한 판결문을 크게 낭독한 후, 임시군사법정에 제출하였다. 그  사실내용을 진술한 아래 증인들의 선서진술서를 법정에서 낭독하여 피고인들에게 제시하였음.

Ambarawa 제 4수용소: XXXXXXXXXX
XXXXXXXXX가 책임자로 있던 암바라와(Ambarawa) 제 4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증인은, 1944년 2월 25일 수용소 내 18세~26세에 해당되는 모든 부녀자들과 함께수용소 내 사무실로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알지 못했지만, 수용소내 등록절차와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하였다. 사무실에 있던 한 일본인 장교가 여성들에게 질문을 하고 두 눈으로 그들을 면밀히 검사하였다. -중간생략-
Semarang Curaboe
증인이 스플렌드디 호텔(Hotel Splendid)에 도착했을 때, 일부 소녀들이 검사실에서 검사를 받고 있었고 그 곳에서 피임약이 들어있는 상자를 발견하였다. 그 순간 자신이 위안소에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 각자 방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거절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구타와 주먹질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돌아왔고 학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제압되었다. 소녀 2명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잡혀 다시 끌려왔다. 의사들은 매주 찬장(벽장)을 거꾸로 뒤집어 그 위에 지저분한 침대요를 깔아 놓고검진을 실시했다. 한 소녀가 퀴닌(quinine)을 과다 복용해 자살을 시도했고, XXXXX부인은 반쯤 미쳐 암바라와(Ambarawa)수용소로 보내졌다.

1944년 4월1일, 소녀들은 또 다른 위안소인 “Pension van Brussel”로 끌려가, 4월 26일 그곳이 문을 닫자 1944년 5월 9일 바이턴조르흐(Buitenzorg)에 있던 Kota Paris 수용소로 끌려갔다.

암바라와(Ambarawa) 제 6수용소: XXXXXXXXXX
1944년 2월 23일, 서너 명의 일본인들이 수용소(암바라와 제 6수용소)에 찾아와수용소 내 17세~28세에 해당되는 모든 여성들을 한 줄로 정렬시켰다. 그들은 몰염치하게도 여성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면밀히 살펴보고, 질문에 답을하게 한 다음, 여성들 이름이 적혀있는 명단의 이름 뒤에 표시를 하였다. 불안해진 여성들은, 그 일본인들에게 검사이유를 묻자 아무런 일도 아니니 걱정할필요가 없으며, 수용소 밖 사무실에서 일할 사람을 선발하기 위한 검사일 뿐이라는대답을 들었다. 그러한 대답들은 수용소책임자에게만 전달되었다. 2월 26일 이후, 그 일본인들이 다시 와 10명의 여성을 호출했지만, 그 중 한명은몸이 아파 9명만이 불려왔다. 불려온 여성들 9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자매인 XXXX와 XXXX, XXXX부인, XXXX, XXXX, XXXX, XXXX, XXXX 그리고 증인. -중간생략-

며칠 후, 일본인손님을 상대로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거절하였지만, 일본인들 중 이름이 XXXX인 일본인이 그들을 비웃으며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다. 1944년 3월 1일 사법위원회(the Board of Justice)에 근무하고 있던 XXXX 그리고 XXXX라는 이름의 일본인 2명이 또 다른 일본인 4명과 함께 찾아왔다. 그들은 각자 소녀 한명씩을 붙잡고 소녀들의 방으로 끌고 갔다. 끔찍한 장면이 이어졌다. 소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다.

이름이 XXXX인 일본인이 증인을 끌고 갔다. 30분간의 실랑이 끝에 그는 증인을 간신히 침대에 눕혀, 강제로 순결을 빼앗았다. 그 전까지 그녀는 어떤 누구와도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다른 소녀들에게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신경쇠약에 걸린 XXXX부인은 그 후,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몇 일후,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던, XXXX부인은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 위안소에서 풀려났다. 그 날 이후, 그들은 강제매춘을 강요받았고, 매일 밤 3~4명의 일본인 손님을 상대로 강제로 성관계를 가져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그 위안소가 문을 닫았던 1944년 4월말까지 지속되었다. 위생상태는 열악했다. 그 곳엔 피임약과 소독약이 상당히 부족했다. 처음 그 곳엔 관주기(irrigator)가 하나도 없었다; 빈번하게 폭력이 가해져 며칠 동안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XXXX의 경우, 소녀들을 괴롭히진 않았지만, 종종 짐승과 같이 난폭한 행동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증인은 임신을 했지만, 유산을 했다. 일부 여성들은 성병에 걸렸다. 증인이 10일 동안 미친척 행동하자, XXXX는 손님 받는 일을 계속 거절하면, 매일 15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하는 군 위안소로 보내겠다고 증인을 협박하였다.

암바라와(Ambarawa) 제 4수용소: XXXXXXXXXX
– 1944년 2월 23일, 2명의 일본군과 6명의 일본 민간인이 증인이 수용되어 있던암바라와 제 4수용소에 찾아와, 17세~28세에 해당되는 모든 여성들을 수용소 내사무실로 불렀다.- 중간생략-그들은 내용을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해야 했다. 함께 있던 다른 소녀들이 서류 내용에 대해 물어보자, 욕설을 해됐다. 약 40명의 여성들이 4명의 일본인들에게 배분되었다. 증인또한 나머지 9명의 여성들과 함께 XXXX에 의해 선발되어 Kebon Blakang거리의 오래된 중국식 건물로 끌려가, 각자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다.

1944년 2월 27일, XXXX의 사무실에 불려갔던 기혼 여성 2명이 되돌아와, 자신들에게 일본인들의 잠자리 상대역할을 해야 하고 1944년 3월 1일 그 위안소가 문을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 날 저녁, XXXX의 명령으로, 그녀는 XXXX라는 이름의 술 취한 일본인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가, 그 남자가 자신의 순결을빼앗는 것을 참아야했다. 그녀는 그를 밀쳐내려고 애썼지만, 강제로 성관계를 가져야만 했다.

그녀는 감히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런 잠자리로 인해 그녀는 크나큰 고통을 받았다. 이 날 이후, 그녀는 매일 밤 3명의 일본인 손님을 상대해야 했다. 그위안소에선 형식적인 검진이 매주 이루어졌다. 1944년 4월 26일, 그녀는 자신이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의사인 XXXX에 의해 소파수술(중절수술)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성병에 걸려있었다. 그녀는 XXXX라는 이름의 일본인과 마주치자, 자신이 언급했던 XXXX라는 사람이 그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암바라와(Ambarawa) 제 6수용소: XXXXXXXXXX
증인은 암바라와 제 6수용소에서 있었던 여성 선발 및 유괴 그리고 카나리란(Kanarielaan)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증인 XXXX와 거의 동일한 진술을 하면서, 한 일본인이 말한 내용 또한 덧붙였다. 즉 소녀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여성들이어떻게 생각하지는 그 일본인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일본인들은 백인들처럼 그렇게 사악하지(나쁘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성들은 XXXX의 명령에 따라, 카나리란 거리에 있는 여러 곳의 위안소에 배분되었다.

그녀는 XXXX, XXXX, XXXX, XXXX, XXXX부인 및 자식이 있던 XXXX부인 그리고 자신의 언니와 함께 장교용 위안소인 쇼코클럽(Shoko-club)으로 끌려가 각자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다. 2월 29일, 그녀들은 자신들이 평생 동안 위안소에서 일을 하거나 혹은 죽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XXXX로부터 들었다. 그녀와 그녀의 언니, XXXX부인, XXXX 그리고 XXXX 등은 죽음을 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그녀들을 구타하면서, 만약 그럴 경우, 자신들의 부모들이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절하였다. 그들 모두는 의사인 XXXX로부터 검사를 받았다.

그날 저녁, 여성들 모두는 XXXX, XXXX, XXXX, XXXX, XXXX 및 또다른 일본인 3명과 함께 동석하였다; XXXX가 신호를 하자, 일본인들은 각자 소녀 한명씩을 붙잡아 그녀들의 방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XXXX에게 배정되었고, 오랜몸싸움이 끝난 후 강제로 그녀의 순결을 빼앗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정신이 멍해지고 몸이 지쳐버렸다. 나머지 여성들 또한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다. 매일 밤, 그녀는 일본인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1944년 4월 25일, ‘쇼코클럽’이 문을 닫자, 5월 9일 이후, 모든 여성들은 바이턴조르흐(Buitenzorg)에 있던 kota Paris 수용소로 끌려갔다. 위생 및 의료상황 등이 열악했다(피임약 및 소독약 등이 충분하지 않았다).

XXXXXXXXXX :
XXXX란 이름의 포주가 있었는데, 증인이 매춘을 거절하자, 하루는 그녀와 언니를상황이 훨씬 열악한 군 위안소로 보낼 거라고 협박했다. XXXX는 여성들 중 어느누구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XXXX와 마찬가지로, 다른 위안소에서 온 여성들중 일부는 성병에 걸렸다. 그녀의 언니인 XXXX는 의사인 XXXX에게 순결을 빼앗겼다. XXXX부인의 말에 의하면, XXXX는 여성들로 하여금 매춘을 강요하는 일에 대해 상당히 후회하지만, 명령을 따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XXXX는 늘 점잖았으며 쇼코클럽에 있던 여성들 중 누구와도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녀는 XXXX가 XXXX로부터 명령 받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암바라와(Ambarawa) 제 6수용소(쇼코클럽: Shoko-club): XXXXXXXXXX
증인은 그녀의 언니인 XXXX와 동일한 내용을 진술하면서, 오랜 실랑이 끝에 의사인 NAKASHIMA에 의해 강제로 순결을 빼앗겨 피로감과 고통으로 인해 거의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XXXX, XXXX, XXXX, XXXX 그리고 XXXX 등이 증인언니의 순결을 빼앗았다.

암바라와(Ambarawa) 제 4수용소: XXXXXXXXXX
증인은 암바라와 제 4수용소 책임자였다. 1944년 2월 24일, 일본인 8명이 수용소(당시 그 수용소는 여전히 현지인의 감독 하에 있었다)를 찾아와 수용소 밖 사무실에서 일할 사람 선발과 관련한 등록절차상의 이유로 수용소 내 18세~28세에 해당되는 모든 부녀자들을 불러 모았다. 1944년 2월 26일, 일본인 3명이 다시 수용소를 찾아와 부녀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이들 여성들이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며 30분 이내로 떠날 채비를 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은 명령을 거절했다. 수용소에 있던 어머니들과 가족들이 다 모였고, 수용소 전체가 이 일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경비태세로 들어갔다. -중간생략-

1944년 4월 말, 사령부에서 나온 한 대령은 소녀들에 대한 질문을 받자 자신은 그녀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종전 후(1945년 9월), 증인은 XXXX부인으로부터 소녀들이 명예롭지 않은 목적(indecent practices)을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마헤이라(Halmaheira): XXXXXXXXXX
1944년 2월 20일 경, -중간생략- 세마랑과 암바라와 등지의 수용소에서 끌려온 부녀자들도 있었다(총 50~60명 정도). 그 곳에서 일본인 5명이 소녀들을 선발했다. 포주인 XXXX와 XXXX 및 XXXX소령 또한그 곳에 있었다. 그들은 일본어로 작성된 서류에 서명을 해야 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증인이 서류 내용에 대해 물어보자, 누군가가 그녀에게 ‘서명이나 해!’라며 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소녀 3명 그리고 6명의 부인들과 함께 파비용호텔(Hotel du Pavillon) 뒤편에 있는 위안소로 끌려갔다.

히노마루(Hinomaru)
그 위안소의 포주 이름은 XXXX였다. 각자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다. 방을 배정받은 이유에 대해 물어보자, 일본인들과 성관계를 갖기 위해 위안소에 수용되었고, 만약그 일을 거절할 경우, 수용소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가장 가혹한 조치가 취할 것이라고 포주인 XXXX가 말했다. 1944년 3월 1일, 위안소가 문을 열었다. 증인은 XXXX라는 일본 민간인 남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증인은그를 발로 차고, 때리고, 할퀴는 등 반항도 해 보았지만, 그는 그녀의 옷을 벗겨 제압했다. 너무 지친 나머지 증인은 그에게 저항할 힘도 없었다. 그 이전까지 증인은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당시 증인은 생리 중이었지만, XXXX는 그런 건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녀는 하룻밤에 3명의 남자를 상대하거나 혹은 밤새 1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야만 했다. 8일이 지나자, 몸이 아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5주 후,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다.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매번 강제로 일을 했다. XXXX, XXXX 그리고 XXXX 등은 강제로 그녀의 순결을 빼앗았다. 강제매춘으로 생긴 육체적인 상처 외에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마헤이라(Halmaheira): XXXXXXXXXX
1944년 2월 23일, 증인이 수용되어 있던 Halmaheira 수용소에 내 18세~25세 사이에 해당되는 모든 여성들이 일본인들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중간생략-

세마랑쿠라부(Semarang Curaboe)
위안소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 방을 배정받았다. 그 해 2월 26일~27일 밤사이, 술에 취한 일본인 몇 명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와 XXXX와 XXXX를 강간했다. 그위안소의 공식 개업일은 3월 1일이었고 모든 소녀들이 강제로 일본인 손님을 받을때마다 실랑이가 있었다. 3월 3일~4일 밤사이, 증인은 일본군 대위인 XXXX에 의해 힘으로 제압당한 채 강간을 당했다. 그 날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증인을 강제로 제압하지 못했다. 증인은 칼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앞에서 언급된 XXXX와 함께 탈출했지만, 그 날 밤 다시 붙잡혔다. XXXX는 소녀들이 손님 받는 것을 거절하자 그들을 구타했다. 증인 또한 같은 이유로 XXXX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암바라와(Ambarawa) 제 6수용소:
증인은 1942년 12월부터 1944년 2월 26일까지 암바라와(Ambarawa) 제 6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2월 26일, 그녀는 다른 8명의 소녀들과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 수용소 밖으로 끌려갔다. 1944년 2월 20일, 일본군 대위인 XXXX(피고 Ⅶ)는 일본인 5명과 함께 수용소를 찾아와, 18세~20세에 해당되는 소녀들을 모두 불러 나이와 결혼 상태 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중간생략- 1944년 2월 26일, 증인은버스에 실려 세마랑에 있는 큰 건물로 끌려갔고, 그 곳에 있던 약 40명 내외의 여성들을 만났다; 일본군 소령인 XXXX는 그 곳에서 여성들을 선발하여, 증인을 포함한 다른 8명의 여성들을 쇼코클럽(Shoko-club)으로 끌고 갔다;

쇼코클럽(Shoko-club)
그 곳에 도착하자, XXXX(XXXX)는 여성들 각자에게 방을 지정해주었다; 증인은 먼저 내용을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해야 했지만, 그 서류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무런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 서류 내용에 대해 증인이 묻자, 그녀에게 큰 소리를 질러댔다. 증인은 나중에서야 그 서류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위안소에서 자발적으로 일 할준비가 되어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44년 2월 29일, XXXX는 XXXX(의사)와 함께 찾아와, 매춘부로 일하기 위해 세마랑으로 끌려왔다고 그들에게 말하면서, 만약 그 일을 거절할 경우, 수용소에 있는 부모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굶겨 죽이거나 혹은 바다에 던져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계속 거절하자 협박이 이어졌다. XXXX는 장교들에게 소녀 한 명씩을 지정해주었고 증인에게도 자신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자고 명령했다. 그는 증인에게 침대에 누우라고 말했지만, 거절하자 그녀를 침대위로 던져버렸다. 학대가 두려운 나머지 증인은 더 이상저항하지 않았지만, 성관계를 가지는 동안 XXXX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증인은 남자를 사귄 적인 전혀 없었고, XXXX에 의해 순결을 잃었다. 그날 이후, 증인은 매일 밤 강제로 일본인과 잠자리를 가져야 했다. XXXX는 매주 한두 차례 증인을 찾아왔다. 약 일주일 후, 손님 받는 일을 여성들이 계속 거절하자참을 수가 없었는지 XXXX는 여성들을 모두 불러 모아 더 이상 거절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여건이 훨씬 열악한 다른 위안소로 보내버릴 거라고 말했다.

게당겐(Gedangen): XXXXXXX
증인이 세마랑의 게당겐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1944년 2월 혹은 3월경, 수용소내 16세~30세에 해당되는 부녀자들은 모두 수용소 내 사무실에 신고하라는 통지문이 내려왔다. 어머니들과 수많은 여성들이 항의를 하자 일본인들을 경찰 들에게 차고 있던 군도(軍刀)를 휘두르라고 명령하자 소동이 일어났다. 두 명의 자식(각각 2살과 4살)을 둔 증인은 수용소를 떠나 Bodjong의 뒷골목에 있던 위안소에 도착했다. 그 곳 포주는 XXXX였다. 며칠 후, 일본이 3명이 우리를 찾아와 남자를 손님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인들 또한 부인들과 함께 식당에서 일을했기 때문에 우리도 식당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있었다. 그러자 심한반발이 있었고, 많은 여성들이 자살을 기도했지만, 학대가 두려운 나머지 그 말을따랐다. 강제로 일을 시키기 위해 얼굴을 때리기도 하고 한번은 한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마룻바닥을 끌고 다녔다. XXXXXX는 심각한 신경쇠약에 걸렸다.

할마헤이라(Halmaheira): XXXXXXX(현재 21세)
1944년 2월 3일, 증인은 할마헤이라(Halmaheira)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 1944년 2월 23일, 세마랑 쿠라부(Semarang-Curaboe)에서 온 XXXX, 히노마루(Hinomaru)에서 온 XXXX 그리고 후타바슈(Futabasju)에서 온 XXXX를 포함해 총 6명의 일본인이 찾아왔다. 그들은 수용소 내 17세~35세에 해당되는 부녀자들을 모두 사무실로 불러…-중간생략-

세마랑 큐라부(Semarang Curaboe)
며칠 후, 맨 먼저 나오는 이름의 소녀들(XXXX와 XXXX)이 강간을 당하며 끔찍한 비명소리를 질렀다. 그 당시 XXXX는 ‘저기 우리의 첫 번째 먹이감(희생자)이 오네’라고 말했다. 그 두 소녀는 자신들이 강제로 침상으로 끌려가 순결을 잃었다고 말했다. XXXX는 충격을 받아 이틀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 모든 소녀들은 차례로 일본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저항도 해 보았지만, 그들 모두는 강제로 성관계를 가져야만 했다.

어느 날 오후 XXXX와 XXXX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그 날 저녁바로 경찰에 붙잡혔다. 절대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겠다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게 폭행을 당하자 심한 충격을 받은 XXXX는 주머니칼로 자신의 동맥을 그어, 과다출혈로 인해 그녀는 36시간동안 의식을 잃었다. XXXX부인의 경우, 한일본인이 자신을 강제로 제압하려고 하자 두 다리를 꼰 채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무척 화가 난 그 일본인은 그녀를 구타하고 발로 배를 걷어찼다.

3월 5일, 증인 자신은 XXXX로부터 계속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 명령을 거절했다. 다음날 아침, 한 일본군 하사관이 증인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방으로 끌고 가, 협박하고 옷을 찢어 벗긴 후 강제로 순결을 빼앗았다. 그 이전까지 그녀는 성관계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날 이후, 증인은 일본인들과 매일 7~8차례 성관계를 가져야 했고, 어떤 때는 5분마다 상대해야 했다.

이곳이 문을 닫자, 증인은 XXXX가 운영하고 있던 위안소인 히노마루(Hinomaru)로 끌려갔다. 특히, XXXX와 XXXX를 포함해 그 곳에서 강제로 일하고 있던 소녀들 중 몇 몇은 성병에 걸렸다. 증인은 XXXX에 의해 순결을 잃었다. 피고 XXXX와 대면한 증인은, 1944년 세마랑의 한 위안소에서 10차례 강제로 성관계를 강요했던 그 남자가 피고임을 알아보았다. 증인은 부당한 대우로 인해 결국 그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증인은 일본인인 XXXX(Kempeier)와 더불어 또 다른 일본인인 XXXX(Kempeier)를 알아보았다. 이 남자는 증인이 세마랑의 한 위안소에 있을 때두 달 동안 증인을 찾아와 매번 구타하고 침대위로 던진 후 옷을 벗겨, 증인의 저항과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던 그 남자였다. 물론 증인이 이일본인을 조금 사랑하고 있었던 점은 인정해야 한다. -중간생략-

관련 증인들의 진술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명백해졌다.
앞에서 언급된 수용소의 여성들에게 그들이 수용소 밖에서 하게 될 일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부녀자들을 선발하기 위해 찾아온 일본인들의 의도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늘 안심시키는 대답만 해주었다. 결국 수용소를 떠나 세마랑의 카나리란(Kanarielaan)으로 끌려갔던 부녀자들은 위 안소에서 매춘부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이들 부녀자들 대다수는 학대 및 물리적 폭력으로 강제로 일본 남성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이런 목적으로 기소장에 언급된 4곳의 위안소에 감금되었다. -중간생략-

더구나, 매춘부로 일하는 것을 계속 거절할 경우, 부모들을 살해하거나 학대할 것이며 군 위안소나 여건이 훨씬 열악한 다른 위안소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을많은 증인들이 진술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보건대, 일본인들은 수용소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네덜란드 부녀자들이 서양의 기준으로 볼 때 명예롭지 않고 정숙과 배치되는 일을 적대국을 위해 일반적 그리고 원칙적으로 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단지 이 이유만으로 이들 부녀자들을 속임수와 강압적 수단을 통해 데려갔다면, 부녀자들이 저항 해봤자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처지에 자신들이 놓여있다는. -중간생략-

따라서 기소장에 기술된 시간과 장소에서 다음에 언급된 부녀자들(끌려온 수용소의 확인이 가능한)이 강제매춘을 위해 아래의 수용소에서 유괴되었다는 사실이 군사법정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판단되며, 해당 수용소 및 부녀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암바라와 제 6수용소: 자매인 XXXX, XXXX, XXXX부인, XXXX, XXXX, XXXX 그리고 XXXX. 그 이후, 세마랑의 카나리란(Kanarielaan)에 있던 한 건물에서 여러 포주들에게 분배되어 세마랑 쿠라부, 쇼코클럽, 히노마루 및 세이운소(Futabasju) 등의 위안소에 감금되어 그 곳에서 강제매춘을 당했다. -중간생략-

전시 때,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 특히, 군사작전과 관련되었거나 혹은 군의 이익에 위배되었을 때, 일반적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전쟁행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그처럼 과도한 처벌을 피할 수 있고, 관계가 전혀 없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사건의 경우 후자에 포함되며, 수용소 부녀자들의 모집 및 선발행위는 결코 군인의 임무에 속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군사작전 혹은 전쟁행위 등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관련성도 전혀 없는 행위이다. -중간생략-

판결선고와 관련하여:
전쟁범죄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행위이지만, 그 행위가 오랜 기간 동안 매우 열악한 수용소의 상황 하에서 지내고 있던 부녀자들에 대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행위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성격의 범죄행위에 포함될 수 있다. 그리고 일본군 점령정부 스스로가 부녀자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이들을 매우 의존적인 상태로 내몰아 이들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령당국의 대표자들은 조직적으로 무기력, 의존 및 종속 등의상황을 이용해 수많은 부녀자들을 속임수 및 강압 혹은 협박 등을 통해 수용소에서 유괴하여 그들로 하여금 가장 고통스러운 신체검사를 겪게 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일반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예의가 놀라울 만큼 결여되었으며 일본군 점령당국하의 적대국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마저 완전히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며칠 동안 위안소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증인들이 간략히 진술한 장면들은 약간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강제에 의해 이들 부녀자들이 처한 입장은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했고 탈출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 그들 대부분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 중압감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몇 차례 충격 및 정신이상증세(법정에서 최고령자인 의사가 정신적 흥분 (mental excitement)으로 기술함)를 겪었다.

처음엔 저항도 해 보았지만,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행위의 희생자들은 저항자체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여 저항을 멈추었던 상황은 결코 이들 부녀자들이 자발적으로 매춘행위를 했다는 결론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피고인들은 이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 면제받을 수 없으며, 위안소를 찾은 일본인들의 원하는대로 그들이 순응한 것은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이며, 따라서 본 사건에선 근본적인 행동의 자유라는 문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이들 범죄들은 일본군이 최초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기간에 일어난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일어났다. -중간생략-

위안소 내 음식 및 시설 등과 관련된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용했으며, 더욱이 이러한 상황은 일본인들 스스로가 만들었고 보존한) 수용소에서 소위 지원자를 모집하다는것 자체가 도덕성 및 인간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범죄자로서의 자격을 얻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런 동정심도 없이 냉정하고 신속하게 위안소 설립 및 인원배치 그리고실행 및 운영에 관한 계획을 수행했던 피고들은 중대한 전쟁범죄자로 분류하여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

이들 위안소 설립계획에 함께 참여했던 피고 Ⅲ은,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선발된 부녀자들에 대해 저지른 끔찍한 부당행위는 그의 사악한 심리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부녀자들의 선발행위는 “충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의사결정”이라는 원칙을 충족 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피고는 알았어야 했다. -중간생략-

그들은 상급자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고 있지만, 일부 일본인들 사이, 포주라는 직업을 원할 경우, 사전에 위안소를 설립하지 않아도 포주라는 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본 법정은 그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기각한다.

그와 같은 일에 자신들을 힘을 빌려주는 특별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피고들은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 명백하다. 이들 4명의 피고인들 사이 유일한 차이점은 피고 9 XXXX와 피고 11 XXXX가 이미이전부터 이 일에 종사해온 반면, 피고 10 XXXX와 피고 12 XXXX는 이 일에 종사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자란 것이다.
앞의 두 피고인들은 매춘에 대해 보다 더 큰 식별력(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라고 판단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분명한 것은 피고 Ⅸ는 자신이 운영한 위안소에서 너무나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행동했으며, 일본의 기준에 따라서도 심한 경우였다. 정신이상, 자살시도 및 2차례의 탈출시도 등의 일들이 그가 운영한 위안소에서 일어났다.

아마, 이런 이유로 인해 이 세마랑-쿠라부(Semarang-Curaboe)위안소는 금방 문을닫았고, 그 곳에 있던 부녀자들은 다른 위안소로 배분되었다고 생각된다. 법정은 피고 Ⅸ에 대해 사형, XI에 대해 실형 20년을 요청한 것은 너무 지나치며각각 실형 20년과 15년이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피고 Ⅹ와 Ⅶ에 대해 청구한 처벌 또한 너무 낮다. 그들의 직업이 포주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들을 포주로 임명한것에 대해 항의 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져야 할 것이다. 법정은 피고 XI에게 그의 상황이 피고 Ⅹ보다 훨씬 어려웠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피고 Ⅲ의 일상적인 압력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그는 포주에 더 가깝다. 이러한 이유로 피고 Ⅹ에게 실형 10년 그리고 피고 XII에 대해 실형 7년이 더 적당해 보인다. 두 명의 의사(피고 Ⅴ와 피고 Ⅵ)는 직업상 그들의 책무인 도덕적 의무에 위배되는 지나친 행위를 했고, 그 이유만으로도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피고 Ⅴ의 경우, 고령인 점은 유일한 경감사유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의 판결은 그들의 범죄행위에 정비례한다. 비록 법정은 피고 Ⅳ의 행동이 상당히 쾌심하지만, 그의 죄가 피고 Ⅲ의 그것만큼 중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법무관이 청구한 형량을 따르고자 한다. 1946년 법령집 제 44호, 동년 법령집 제 45호 및 47호~74호의 전쟁범죄에 관한형법(the Penal Law Decree on War Crimes) 제 I조 6번과 7번 그리고 35번에 따라.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위에서 언급된 피고인들 -피고 Ⅱ XXXX와 피고 Ⅷ XXXX 등은 제외. 두 사람의 경우, 그들에게 제기된 혐의에 대해 법적으로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 의 전쟁범죄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함:
피고 Ⅲ, XXXX, – “강제매춘을 위한 부녀자 유괴”, “매춘강요” 및 “강간”;
피고 Ⅳ, XXXX, – “강제매춘을 위한 부녀자 유괴”, “매춘강요”
피고 V, XXXX, – “포로에 대한 부당대우”
피고 Ⅵ, XXXX, – “포로에 대한 부당대우” 및 “강간”
피고 Ⅶ, XXXX, – “강제매춘을 위한 부녀자 유괴”
피고 Ⅸ, XXXX, – “매춘강요“
피고 Ⅹ, XXXX, – “매춘강요“
피고 XI, XXXX, – “매춘강요“
피고 XII, XXXX, – “매춘강요“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을 선고한다:
피고 Ⅲ, XXXX, – 사형
피고 Ⅳ, XXXX, – 실형 10년
피고 V, XXXX, – 실형 7년
피고 Ⅵ, XXXX, – 실형 16년
피고 Ⅶ, XXXX, – 실형 2년
피고 Ⅸ, XXXX, – 실형 20년
피고 Ⅹ, XXXX, – 실형 10년
피고 XI, XXXX, – 실형 15년
피고 XII, XXXX, – 실형 7년
그리고 아래의 피고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피고 Ⅱ, XXXX와 피고 Ⅷ, XXXX

이 판결은 1948년 2월 14일, 주재판사인 중령 Mr. J. La Riviere, 소령 Mr, L. F. de Groot, 대위 Mr, A. J. A. Theys, 중위이며 서기관인 Mr. A. Uyt den Bogaard이 배석한 자리에서 내려졌고, 1948년 3월 15일 요약 및 확인되었다.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서기, 주재판사: 서명: A. Uyt den Bogaard 서명; J. La Riviere
1948년 3월 22일인 오늘, 바타비아 행정청 임시행정관인 본인 M. A. F. ZWAGER는 위 판결의 집행을 허가한다.

바타비아 임시행정관
1948년 3월 24일 임시군사법정 개정 중 주재판사, 중령 Mr. J. La Riviere, 소령 Mr, L. F. de Groot, 대위 Mr, A. J. A. Theys, 중위이며 서기관인 Mr. A. Uyt den Bogaard이 배석한 가운데, 법무관 Mr. J. Diephuis, 피고들 그리고 피고 변호사에 의해 선고됨.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서기, 주재판사: 서명: A. Uyt den Bogaard 서명. J. La Riviere 원본임을 확인함, 서기, 서명: A. Uyt den Boga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