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기업시민, 무엇을 할 것인가?”(3) – 코린도 사회공헌재단의 이순형 사무총장

코린도 그룹 승은호 회장이 파푸아섬에서 지역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 제1부 『길이 없을 때 우리는…』      
■ 제2부 『고통 로용의 길을 닦다』     
■ 제3부 『함께 걷자! INDONESIA』

이제 인도네시아에서 기업을 할 때 허가, 등록, 설립 등 업무 외에도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건 이제 좋은 사업 아이템, 경기의 활황 뿐만 아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기반을 다지기 위해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필수가 되어버렸다.

이에 코린도 사회공헌재단의 이순형 사무총장이 지난 30여 년간의 사회공헌활동 변천사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CSR에 대한 요구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기고해 연속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제 3부『함께 걷자! INDONESIA』

# 프롤로그 : 드디어 육지에 발을 내딛다.

코린도 그룹 김상진 부회장과 코린도 사회공헌재단 이순형 사무총장은 PALU시 빤토로안(pantoloan) 항구에서 수마르소노 인도네시아 적십자사 재난구호팀장에게 합판을 전달하고 있다.
코린도 그룹 김상진 부회장과 코린도 사회공헌재단 이순형 사무총장은 PALU시 빤토로안(pantoloan) 항구에서 수마르소노 인도네시아 적십자사 재난구호팀장에게 합판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10월 31일. 전날 밤부터 정박할 차례를 기다리며 물 위에 떠 있다가 다음 날 정오쯤이 되어서야 술라웨시 동갈라 동쪽 Pantoloan 항구에 발을 디뎠다. 여기 저기 결리는 몸을 펼 새도 없이 눈에 들어오는 부두의 풍경은 황량 그 자체였다.

내가 내렸던 부두 옆에는 페리호 부두였는데, 선착장 중간까지 쓰러진 컨테이너가 걸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부두인데도 치울 사람도 없을 만큼 그곳은 아직도 일손도, 물자도 부족한 결핍의 시간이 흐르는 듯 했다.

이미 부두의 크레인들도 다 쓰러져 있고,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우리 배에 하역용 크레인이 없었다면 하역하는 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부두 사정을 모르는 채 일반적인 하역 시간을 계산해 배를 빌렸다면, 용선료 때문에라도 합판을 마구잡이로 내리다 파손되거나, 아니면 크레인이 없으니 하염없이 느리게 물건을 내리다 궂은 날씨에 비라도 맞았을 게 분명해 보였다.

부두의 상태를 보고 나는 ‘우리 배에 직접 합판을 실어 전달하기로 계획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도우면서 근본적인 솔루션을 제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매번 느낀다. 그러나 요즘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실시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새로운 경향이랄까,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CSV(Creating Shared Value), 직역하자면 ‘공유가치 창출’이다.

이 개념을 좀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업이 사회적 문제나 이슈를 경영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이윤창출과 함께 개선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이윤창출은 단순히 매출과 순이익 차원이 아니다. 기업의 신용도 상승 등 무형의 가치를 포함한 넓은 범위의 이윤을 말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회공헌이라 함은 회사의 남는 자원이나 이익을 단순하게 환원하는 단편적인 기부와 활동 차원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CSV는 기업의 경영핵심역량을 사회문제해결을 위해 직접적으로 투입해 기업경영활동의 한 부분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차별점이다.

CSV의 성공적인 사례로 스위스의 한 식품 기업의 사례가 있다.
에티오피아의 산골짝에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커피 원두 생산지가 있다. 그런데도 이곳 농부들의 생산량은 떨어지고 빚은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이곳에서 커피 원두를 구매하는 기업은 실태 조사에 나섰고, 그 결과 악순환의 원인을 발견했다. 농부들의 소득이 커피를 수확해 판 날부터 다음 수확 때까지 버틸 수가 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돈이 떨어지면 커피 농사를 중단하거나 다음 수확을 위해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듭해서 빌린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좋은 원두가 생산될 수 없는 구조였다.

이때 기업에서 제시한 것은“책임 농업” 프로젝트다. 농부들은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봄에는 채소를 심고, 당나귀나 말 등 가축을 기르며 수익을 다변화했다. 그들이 키운 당나귀와 말은 농부들이 더 이상 중간상에게 커피 과육을 넘기지 않아도 되는 훌륭한 기반이 되었다. 커피 원두를 직접 싣고 처리장으로 올 수 있어 농부들에게 기존보다 많은 이익이 돌아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책임 농업”프로젝트를 전개했던 기업은 이곳에 현대식 장비를 들여와 커피 과육을 벗겨내게 해 기존에 비해 물을 덜 사용하면서 벗겨진 과육을 퇴비로 사용하게 유도했다.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품질 좋은 원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농민 소득은 크게 증가시켰다. 어쩌면 이 기업이 다른 대체 생산지를 찾아 나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상품을 지속적으로 판매하기 위해 이 기업은 생산지의 변화와 혁신을 유도했다. 더 나아가 그 마을이 이 기업의 원자재를 생산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문제 또한 방지하게 했다. 기업과 생산기지의 상생이 조화롭게 이뤄진 사례다. 이 기업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식품회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부 칼럼 사진 (2)우리 회사도 꽤 오래 전부터 지역 주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많은 실험들을 해왔다. 인도네시아 전역에 있는 우리 계열사들의 인근 마을 주민들의 경제적 독립과 사회 복지 향상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계획했던 것이다.

파푸아 주 보벤디굴 군 아시끼 지역엔 지역 사회를 위한 350헥타르 규모의 고무 농장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그곳의 수백 명 주민이 생산을 하면 우리 회사가 다시 그 원료를 사주는 형식이다. 농사에 서툴러 작황이 좋지 않았던 경우엔 농업 전문가를 투입해 농법을 가르쳐주고, 현지에 최적화된 비료도 공급해주는 등 그들의 자립 기반을 만들어주기 위한 지원을 해오고 있다.

농업환경이 좋지 않은 깔리만탄 주 빵깔란분 지역, 마을을 끼고 도는 강이 있어 그곳에 양어장을 설치해 지역 주민들의 소득을 창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자급자족하고 나머지 일부를 우리에게 판매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시험과정을 거쳐 우리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축산 농가 육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소, 돼지, 닭 등 지역 환경에 맞는 축산 업종을 설계해 지역 주민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그러면 이쯤에서 궁금증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삶의 안정이 코린도 이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차라리 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고 쉬운 것 아닌가!’

어쩌면 그게 훨씬 더 편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을 무한대로 채용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인도네시아는 부국(富國)이 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3부 칼럼 사진 (7)자원과 넓은 국토, 많은 인구까지… 이런 조건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인도네시아는 경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까지 여전히 멀어 보인다.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가보면 더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 동기부여가 필요하고, 첫 시작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에 지원을 하고, 지속적으로 선순환이 될 수 있게 돕는 것부터 우리는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구의 고른 분포를 위해 이민정책을 썼지만 지역 간 불균형은 해결하지 못했다. 영토는 넓어도 각기 섬으로 떨어져 있기도 할 뿐만 아니라 지역을 먹여 살릴 산업 기반 시설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 계열사가 있는 지역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직장을 가진 주민들과 특정한 직업과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는 주민들은 성실한 노동의 의미, 가족 부양의 의무, 더 나은 삶을 위한 교육 투자 등에서 이미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랫동안 살아 왔던 터전에서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인도네시아의 공유가치 창출의 시작이라고 본다. 우리가 쉬운 길을 두고 지역민들이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도 그 일환이다.

3부 칼럼 사진 (4)이곳에서 50년 가까이 기업을 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한인 기업, 외국 기업이 아닌 인도네시아 기업이다. 한 사람의 성숙한 시민이 국가의 품격을 높이듯, 기업 시민으로서 인도네시아의 성장을 견인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업의 최우선 목표가 이윤창출이지만, 그 이윤이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가치와 일치하고 상승작용을 할 때 이윤창출의 안정성을 가져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초, 우리 그룹은 “코린도 장학재단”에서 “코린도 사회공헌재단”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향후 우리의 사회공헌 공헌 프로그램의 방향을 인도네시아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업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닦아놓은 길은 우리만을 위한 것도, 인도네시아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제는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새로운 삶의 시작과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길 바란다는 의미다.

# 에필로그
내가 술라웨시 동갈라에서 돌아온 건 지난 11월 2일.
아직도 추수가 끝난 평야처럼 보였던 그곳이 생각난다. 설명을 듣고 난 후 알게 된 것은 지반 액상화 현상 때문에 지표 위의 모든 것을 통째로 삼키고 난 후 지반 자체가 내려앉았던 공포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심각한 타격을 입어 피해 규모도 정확히 산출할 수 없게 사라져버린 그곳엔 얼마 전까지 누군가의 집이 있었을 것이고, 그 집에서 꿈꾸었던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술라웨시는 지금 새로운 가치보다 잃어버린 기초를 되찾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가 싣고 간 합판은 가로x세로x높이 각 1미터의 정육면체를 줄지어 놓으면 1.1킬로미터에 달하는 양이다. 보통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틀이면 다 하역할 수 있는 양이지만, 그곳에서는 하역한지 이틀째에도 30%가 남아 있었다.

내가 떠나오던 날까지 합판 하역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쯤 그것이 기초가 되어 그들의 삶이 안정되는데 쓰이고 있을까?

배를 타고 그곳에 가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또 우리는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는 것을… (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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