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시민,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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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형 사무총장 /코린도 사회공헌재단

이제 인도네시아에서 기업을 할 때 허가, 등록, 설립 등 업무 외에도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건 이제 좋은 사업 아이템, 경기의 활황 뿐만 아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기반을 다지기 위해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필수가 되어버렸다.

이에 코린도 사회공헌재단의 이순형 사무총장이 지난 30여 년간의 사회공헌활동 변천사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CSR에 대한 요구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기고해 연속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 제1부 『길이 없을 때 우리는…』      
■ 제2부 『고통 로용의 길을 닦다』     
■ 제3부 『함께 걷자! INDONESIA』

■ 제1부『길이 없을 때 우리는…』

CSC-팔루 재해 현장바닷길 약 5,000킬로미터를 돌아 도착한 항구
한 밤 중의 바다 위, 도시에서 보기 드문 별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래도 감탄사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선장이 나에게 말을 건다.

“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지점이 쓰나미가 처음 발생한 곳입니다”
육지와 불과 26마일 떨어진 곳. 약 41.8km. 저 멀리 육안으로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시작점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요했다. ‘설마 우리가 넘어가는 그 순간, 또 다른 여진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 기분이 묘했다. 선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CSC-팔루로 행하는 코린도 합판(선장실)“ 우리가 아시끼에서 합판 싣고 나올 때 이쪽 항로를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저 빤토로안 항구 쪽에 불빛이 아주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이제 그런 불빛은 하나도 안보이죠?”

그곳에 불을 밝히고 오고 가는 배에 인사를 건네던 그 항구가 이젠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마 항구에 기대어 살던 수많은 사람들, 그의 가족들은 이미 희생됐거나 살아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한시바삐 항구에 정박해야 했다.

내가 탄 배는 6천 톤 급 화물선으로 약 5천 킬로미터를 돌아 술라웨시 동갈라 동쪽 빤토로안 항구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5천 킬로 미터면 ‘사방에서 머라우께’까지 인도네시아 영토의 끝과 끝을 연결한 직선거리 5,200킬로미터와 맞먹는 거리다. 이 배는 어딜 그렇게 돌고 돌아 왔을까.

CSC-팔루-교량 붕괴우리 회사 합판 공장들이 있는 파푸아 아시끼를 거쳐 중부 깔리만탄의 빵깔란분, 마지막으로 동부 깔리만탄의 발릭빠빤을 거치며 수집한 총 112,120장의 합판을 싣고 강진과 쓰나미가 덮친 술라웨시까지 가는 길이었다.

뻔히 보이는 위치까지 왔지만 우리는 정박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기다려야 했다. 오랜 시간 뱃멀미에 시달리며 달려온 것보다 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문득 이런 자연재해 현장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는 마음보다 앞선 것은 ‘마음이 아프다’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이 세월에 따라 돕는 이보단 도움을 받을 사람을 먼저 생각해서 일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도우면서 슬픔보다는 도울 수 있어 뿌듯함이 컸던 게 사실이다. 우리 회사의 제일 처음도 그랬다.

CSC-코린도 아시끼 병원 - 사진우리 코린도가 인도네시아에 처음 진출한 것은 1969년. 처음엔 인니동화라는 이름으로 낯선 나라에서 회사를 차리는 것도, 동부 깔리만탄의 발릭빠빤 지역에 발을 내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수령이 몇 년인지 짐작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높은 나무들로 빽빽한 밀림은 인간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이 없을 때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길을 닦는 것이다.

대낮에도 우거진 수풀 때문에 태양빛이 지표에 닿지 않아 어두웠던 그 태고의 자연에 사람이 다니고, 장비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우리는 길을 냈다. 산중에 임도(林道)가 나면서 그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땅과 하늘, 그리고 숲 밖에는 없었던 그곳에 나타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첫째, 밀림에 들어가 일을 할 우리 직원들이었고, 그 다음엔 직원들의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그 생산현장에서 먹고 자고 일해야 했기 때문에 직원들의 숙소가 마련되면서 생긴 일이다.

세 번째는 상권은커녕 마을도 없던 곳에 돈이 돌기 시작하자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한 인근 주민들이다. 인근이라고 해봐야 베이스캠프가 있던 지역이고, 그렇게 밀림은 세상과 이어지게 됐던 것이다.

당시 밀림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정처 없이 떠돌며 마음에 드는 곳에 불을 놓고 농사를 짓다 떠나고 또 다시 화전을 일구기를 반복하던 화전민들이었다. 그들이 또 다른 삶의 방식과 지속적인 터전을 가꾸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길이 나면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CSC-팔루 합판 하역그리고 그 길은 우리에게도 길을 만들어 주었다. 순조롭게 원목개발을 하면서 얻은 자신감으로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사업에 뛰어들게 해줬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 합판 공장을 시작하기 위해 중부 깔리만탄 빵깔란분에 처음 들어간 선발대의 임무는 공장부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임시 사무소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호텔은커녕 여인숙 같은 숙박시설 하나 없던 깡촌에 선발대가 임시 거처로 사용한 것은 한 주민의 집. 똘똘한 아들 하나를 둔 그는 낯선 한국 사람들에게 호기심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대했고, 며칠 그곳에 기거하면서 그 곳보다 나은 임시 사무소 자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공장을 다 지을 때까지 우리가 빌렸던 그 집은 우리 사무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집 주인의 영리한 아들은 우리 사무실의 오피스 보이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본격적으로 합판 공장이 가동되면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구 규모의 코린도 타운이 형성됐다. 공장 직원들의 숫자가 몇 백 단위가 되자 사실, 제일 시급한 것은 학교와 사원이었다. 부모를 따라 온 아이들의 학업을 위해 지방 교육청에 학교 설립을 요청했다가 예산 문제로 거절당했다.

그래서 우리가 학교를 지어줄 테니 운영을 해달라 요청에도 요지부동이었던 교육청을 설득했다. 결국 학교 운영자금과 교사 월급까지 모두 지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설립 인‧허가를 받았다.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가 생기자 직원 자녀 외에도 인근 마을 주민 자녀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열렸다.

이전엔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맨발로 걸어서 학교를 다니던 주민들의 아이들이 집과 가까운 곳에 학교가 생기니 지역에 활기가 넘쳤다. 일자리와 학교가 있는 곳으로 슬금슬금 사람들이 계속 유입됐다. 조용하던 깡촌의 왁자지껄한 모습에 우리도 무척 뿌듯했던 시절이었다.

그 중에서 유난히 나의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다. 앞서 얘기했던 우리들의 오피스 보이다.
똘망똘망한 표정으로 우리의 심부름을 곧잘 하면서 학교를 다녔던 영리한 소년의 아버지는 늘 아들의 우수한 학업 성적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도 그런 소년을 무척 귀여워하고 이따금씩 소년의 상여금 형식으로 학비를 대신 내주곤 했다. 그 소년이 점점 자라면서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해서 우수한 성적을 낼 때마다 우리는 그 소년의 아버지처럼 함께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중부 깔리만탄의 우등생 소년은 청운의 꿈을 품고 자카르타로 갔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소년은 코린도의 지원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우리와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 소년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이제는 지긋한 중년의 사나이가 된 그는 지금 인도네시아의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그때부터 교육 지원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어린 오피스 보이의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면서 보람과 동시에 책임감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통행이 불편한 곳에 잘 닦은 길을 완공한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싶은 기분이었다.

사실 우리가 직원 자녀를 위해 설립한 학교와 사원들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할 때도 어떤 목적의식, 기대효과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은 기업의 이런 행위를 사회공헌 활동, CSC(Corporate Social Contribution)라고 분류한다.
CSC란 아무런 대가 없이 기업의 이윤을 되돌려주는 활동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연말연시의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기업의 임직원들이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자원봉사를 하는 등의 자선활동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지역 주민을 위한 병원이나 학교, 복지관, 종교시설을 짓는 등의 기초생활권을 지원하는 일들이 주를 이룬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의 초기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나눔과 성장의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장학사업을 하기 위해 우리 회사에서 코린도 장학재단을 세운 것은 1997년의 일이다. 다른 무엇보다 낙후된 인도네시아의 환경에서 가장 보람된 일은 교육 지원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인도네시아 고급 인력 양성에 기여하고자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의 성적 우수자를 선발하기로 결정했다. 첫 학기의 성적이 우수한 신입생들을 한 해 50여명 선발해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하기로 했다. 물론 졸업 때까지 일정 정도의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항목이 붙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호주 등 전 세계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었다. 그리고 선진국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그 다국적 기업들은 대부분 정식으로 재단을 설립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그 대열에 한국인 기업으로 우리 코린도가 최초로 합류했다. 이제 우리나라 기업들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 나라에 기여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던 기억이 난다.

재단 설립을 마치고 장학생 선발과 지원을 위해 인도네시아 교육부와 협력계약을 맺으려던 찰나,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겼다. 바로 IMF였다. 이제 막 첫 삽을 뜬 코린도 장학재단 사업이 암초에 부딪힐 위기였다.

당시 외환위기 속에서 인도네시아의 기업들은 필수적으로 지출되는 금액 외에는 동결 또는 삭감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 해, 코린도 장학재단 회의실에선 긴박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때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다음호에서 계속)